1. 생애
롯카쿠 요시하루는 롯카쿠 가문의 당주로서 혼란스러운 센고쿠 시대를 겪으며 가문의 쇠퇴를 목도하고, 결국 독립적인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1.1. 출생 및 어린 시절
롯카쿠 요시하루는 1545년 (덴분 14년)에 롯카쿠 요시카타의 적자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노토국의 센고쿠 다이묘인 하타케야마 요시후사의 딸이었다. 요시하루의 아버지 요시카타는 원래 요시후사의 큰딸과 결혼했으나 그녀가 일찍 사망하자, 그 여동생을 계실로 맞아들였고, 요시하루는 이 계실의 소생이다. 요시하루의 생모 또한 1547년 (덴분 16년)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1.2. 교육 및 초기 활동
요시하루는 원복(성인식)을 치르며 초기 이름으로 요시히사(義弼)를 사용했다. '요시(義)'라는 글자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1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받은 것이다. 1561년 (에이로쿠 4년), 그는 아버지 요시카타와 동생 롯카쿠 요시사다와 함께 가와치국의 하타케야마 다카마사와 협력하여 미요시씨를 공격하기 위해 교토로 출병하는 등 초기부터 군사 활동에 참여했다.
1.3. 가독 상속과 아버지의 영향
1557년 (고지 3년) 또는 1559년 (에이로쿠 2년), 아버지 요시카타가 은거하고 조테이(承禎)라는 호를 사용하면서 요시하루는 롯카쿠 가문의 가독을 이어받아 당주가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아버지 조테이가 쥐고 있었다. 1560년 (에이로쿠 3년), 요시하루가 이반한 아자이씨에 대항하기 위해 미노국의 사이토씨와의 혼인 동맹을 추진하려 하자, 아버지 조테이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로 인해 히라이 사다타케, 가모 사다히데, 고토 가타토요, 후세 기미오, 고마 사다 등 '넨요리슈(年寄衆)' 또는 '슈쿠로슈(宿老衆)'로 불리던 다섯 명의 중신들이 견책을 당했으며, 요시하루 본인도 일시적으로 이이타카야마(飯高山)에 칩거하는 상황에 처했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롯카쿠 요시하루의 생애는 가문의 위기와 쇠퇴의 시기와 맞물려 있으며, 그의 주요 활동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2.1. 간논지 소동과 가문의 위기
1563년 (에이로쿠 6년), 요시하루는 롯카쿠 가문 내에서 특히 신망이 높았던 중신 고토 가타토요와 그의 아들 이키노카미를 간논지성 내에서 주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간논지 소동으로 불리며, 이를 계기로 롯카쿠씨 가문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적대 관계에 있던 아자이 나가마사에게로 주군을 바꾸는 가신들까지 나타났다. 이 소동으로 요시하루는 아버지 조테이와 함께 반발하는 가신단에 의해 일시적으로 간논지성에서 쫓겨났으나, 중신 가모 사다히데와 그의 아들 가모 가타히데 부자의 노력으로 간논지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일련의 소동은 고토씨의 강력한 영향력과 더불어 다이묘로서 롯카쿠씨의 권력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음을 상징하며, 롯카쿠씨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센고쿠 다이묘로 이행하려던 시도가 좌절되었음을 보여준다. 『아시카가 기세이키』에는 이 사건이 "사사키 가문 멸망의 단초"라고 기록될 정도였다. 최근의 새로운 학설로는 조테이와 요시하루의 대립과 관련하여, 요시하루와 그의 측근들이 조테이의 신임을 얻던 고토 부자를 숙청하여 조테이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했으나,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는 견해도 있다. 이 무렵 요시히사는 이름을 요시하루로 바꾸었다.
2.2.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의 관계
1565년 (에이로쿠 8년), 교토에서 미요시 산닌슈 등이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살해하는 에이로쿠의 변이 발생했다. 요시하루는 요시테루의 동생인 이치조인 가쿠케이(훗날의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망명해 오자 그를 잠시 숨겨주었다. 그러나 미요시 산닌슈가 관령직 등의 조건을 제시하며 요시하루를 회유하자, 요시하루는 이에 응하여 가쿠케이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결국 가쿠케이는 오미국을 떠났다.
2.3. 육각씨 식목 반포와 계승 문제
1567년 (에이로쿠 10년) 4월 28일, 요시하루는 주군의 권한을 억제하는 분국법인 육각씨 식목(六角氏式目로쿠카쿠시시키모쿠일본어)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가신단에 의해 당주의 권한이 제약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이 시기에 가독을 강제로 동생 요시사다에게 양도했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으나, 이에 대해서는 이설도 존재한다.
2.4. 오다 노부나가와의 대립과 항전
1568년 (에이로쿠 11년),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추대하고 교토로 상경하려 하면서 롯카쿠 부자에게도 군세에 합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롯카쿠 부자는 이를 거부했고, 이에 노부나가는 상경전을 강행하며 롯카쿠 영지로 침공해왔다. 롯카쿠 부자는 미요시 산닌슈의 이와나리 도모미치 등의 원조를 받아 철저히 항전하려 했다. 그러나 격전 끝에 간논지성 맞은편에 위치한 미쓰쿠리성이 함락되자, 롯카쿠 부자는 간논지성을 포기하고 도주했다. 이는 간논지성 전투로 알려져 있다.
이후 아버지 조테이는 고카군의 이시베성(石部城)에, 요시하루는 아이치군의 나마즈에성(鯰江城)에 각각 농성하며 거점을 옮겼다. 그들은 아자이 나가마사와 아사쿠라 요시카게와 연대하여 노부나가를 괴롭혔다. 노부나가의 요청으로 조정이 개입하여 노부나가와 롯카쿠, 아자이, 아사쿠라 사이에 화의가 맺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전열을 재정비한 노부나가는 일방적으로 화의를 파기하고 1573년 (덴쇼 원년)에 아사쿠라씨를, 이어서 아자이씨를 멸망시켰다. 결국 요시하루는 노부나가와 화목하고 나마즈에성에서 퇴거했다.
한편, 아버지 조테이는 이시베성을 거점으로 아시카가 요시아키에 의한 새로운 노부나가 포위망 구축을 지원하는 등 노부나가와의 싸움을 계속했으나, 1574년 (덴쇼 2년) 4월 이시베성이 함락되자 시가라키로 피신했다. 이 무렵 요시하루는 '사사키(佐々木)' 또는 '사사키 지로(佐々木次郎)'를 자칭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사사키 요시타카(佐々木義堯)'라는 인물이 교토에서 추방된 아시카가 요시아키 휘하에서 모리 데루모토 및 그 가신들과 외교 교섭을 벌인 사실이 밝혀졌는데, 요시하루와 요시타카의 관계에 대해서는 동일 인물설과 다른 인물설이 존재한다. 그러나 두 인물의 화압이 거의 일치하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다른 인물로 보기는 어렵고, 요시타카로 개명한 요시하루가 서쪽으로 쫓겨난 요시아키와 합류하여 요시아키의 교토 귀환까지 행동을 함께한 것으로 추정된다.
2.5.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의 활동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가 도래하자, 요시하루는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주최한 이누오모노(犬追物, 개를 쫓는 사냥 놀이)에 궁술 지도역으로 참석한 것이 확인된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토기슈(御伽衆, 이야기 상대)로서 아시카가 요시아키, 시바 요시카네 등과 함께 히데요시를 섬겼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궁술 사범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
3. 사상 및 통치 이념
롯카쿠 요시하루의 통치 이념은 그가 서명할 수밖에 없었던 분국법인 '육각씨 식목'에서 엿볼 수 있다. 이 법은 당주의 권한을 억제하고 가신단의 합의를 중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롯카쿠 가문 내에서 당주 중심의 절대 권력 체제로의 이행이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이는 가신단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했으며, 가문 내부의 질서 유지를 위해 당주의 권한을 제한하는 형태의 통치 철학이 필요했음을 시사한다. 요시하루는 이러한 법적 제약을 받아들이면서 가문의 안정을 꾀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가문의 쇠퇴를 막지 못했다.
4. 개인 생활 및 말년
요시하루는 만년에 출가하여 승려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궁술 사범을 지내는 등 문화적인 활동에 종사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격동의 센고쿠 시대를 겪으며 가문의 몰락을 지켜본 후 조용히 말년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5. 사망
롯카쿠 요시하루는 1612년 (게이초 17년) 10월 22일 가모(加茂)에서 사망했다. 향년 68세이다. 그의 위패는 아버지 조테이(요시카타)와 함께 교토부 교타나베시에 위치한 잇큐지에 안치되어 있다.
6. 평가 및 영향
롯카쿠 요시하루는 센고쿠 시대의 혼란 속에서 가문의 쇠퇴를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치세는 내부 갈등과 외부 세력의 압박으로 점철되었으며, 이는 롯카쿠씨가 다이묘로서의 독립성을 상실하는 결정적인 시기가 되었다.
6.1. 후대의 평가
요시하루의 후손들은 에도 시대에 고케 계층에 편입되어 명맥을 유지했다. 이는 롯카쿠 가문이 다이묘로서의 지위는 잃었지만, 일본 사회 내에서 일정 부분 존속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를 기리는 특별한 기념물이나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육각씨 식목'과 같은 법률 제정은 당시 센고쿠 다이묘들의 통치 방식과 가신단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남아있다.
6.2. 비판 및 논란
요시하루에 대한 비판은 주로 간논지 소동에서의 중신 숙청 사건에서 비롯된다. 이 사건은 가문 내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가신단의 동요와 이반을 초래하여 롯카쿠씨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판단력과 통치 능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또한, 아버지 요시카타의 은거 후에도 실권을 쥐고 있었던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가독 계승과 관련된 논란(동생 요시사다에게 강제 양도설)은 그의 리더십이 불안정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지적된다. 오다 노부나가와의 대립 과정에서 보여준 미흡한 대응과 결국 독립성을 상실하게 된 점 또한 그의 치세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로 이어진다. 『아시카가 기세이키』에 간논지 소동이 "사사키 가문 멸망의 단초"라고 기록된 것은 이러한 비판적 시각을 대변한다.
7. 관련 항목
- 롯카쿠씨
- 롯카쿠 요시카타
- 간논지성
- 아시카가 요시아키
- 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센고쿠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