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로코 도메니코 "로키" 콜라비토 주니어(Rocco Domenico "Rocky" Colavito Jr.영어, 1933년 8월 10일 ~ 2024년 12월 10일)는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이자 코치, 그리고 텔레비전 스포츠 방송 진행자였다. 그는 1955년부터 1968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주로 외야수로 활약했으며, 특히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소속으로 강력한 타격과 강한 송구 능력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콜라비토는 9시즌 동안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프로 선수 생활 초반 11시즌 동안 매년 평균 33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그는 세 차례 40개 이상의 홈런을, 여섯 차례 100개 이상의 타점을 기록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보였다. 특히 1956년부터 1966년까지 11시즌 연속으로 20개 이상의 홈런을 때려낸 아메리칸 리그(AL) 역사상 다섯 번째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1959년에는 한 경기에서 4연속 홈런을 터뜨렸고, 같은 해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을 차지했다. 또한 그는 1965년 시즌에 단 한 개의 실책도 기록하지 않은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외야수이기도 하다.
그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외에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뉴욕 양키스 등 다양한 팀에서 뛰었다. 1968년 은퇴 당시, 콜라비토는 아메리칸 리그 우타자 통산 홈런 순위에서 3위(374개)에 올랐으며, 우익수로 출전한 아메리칸 리그 통산 경기 수(1,272경기)에서는 8위를 기록했다. 선수 생활을 마친 후에는 WJW-TV에서 텔레비전 스포츠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이후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코치로 활동하며 야구계에 기여했다. 2001년에는 베테랑 야구 기자, 경영진, 역사가들의 투표를 통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0명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고, 2006년에는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예를 안았다.
2. 어린 시절
로키 콜라비토는 뉴욕시의 한 자치구인 브롱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열렬한 뉴욕 양키스 팬이었으며, 특히 조 디마지오를 매우 존경했다. 그는 메이저 리그에서 뛰는 꿈을 이루기 위해 고등학교 2학년 과정을 마친 16세의 나이에 시어도어 루스벨트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세미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메이저 리그 규정상 선수는 고등학교 졸업반 학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계약할 수 있었으나, 특별한 호소 덕분에 그는 1년의 대기 기간을 거쳐 프로로 전향할 수 있었다. 뉴욕 양키스는 그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는 재정 문제로 계약을 포기해야 했다. 반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그의 강력한 송구 능력에 관심을 보였고, 스카우트 마이크 맥널리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그의 트라이아웃을 지켜보기도 했다. 결국 콜라비토는 1951년 1월 1일 17세의 나이에 아마추어 자유 계약 선수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계약했으며, 계약금의 3분의 2는 그가 구단 시스템 내에서 성장한 후에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1954년, 그는 마이너 리그 팀인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언스에서 38개의 홈런과 116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뛰어난 잠재력을 선보였다.
3. 프로 야구 경력
3.1. 초기 경력 및 마이너 리그
콜라비토는 1955년 9월 10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1956년 시즌 초반에는 퍼시픽 코스트 리그에서 뛰면서 홈 플레이트에서 133 m (436 ft) 떨어진 중견수 담장을 넘어 공을 던져 그의 강력한 송구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같은 해 7월에 인디언스로 복귀한 그는 .276의 타율과 21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신인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다. 1957년에는 타율 .252에 2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3.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첫 번째 시기)
1958년, 콜라비토는 등번호 6번을 달고 개인 최고 타율인 .303을 기록했으며, 41개의 홈런(리그 선두 미키 맨틀보다 1개 적음)과 113개의 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그 시즌 아메리칸 리그에서 .620의 장타율로 리그를 이끌었는데, 이는 1994년 앨버트 벨 이전까지 인디언스 우타자 중 가장 높은 기록이었다. 그는 MVP 투표에서 3위에 올랐다. 또한 콜라비토는 같은 해 8월 13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클리블랜드 소속으로 3이닝을 무실점으로 던지는 이색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59년에 콜라비토는 42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인디언스 역사상 처음으로 두 시즌 연속 4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그는 그 시즌 하몬 킬러브루와 함께 아메리칸 리그 홈런 공동 선두를 차지했으며(앨 로젠의 구단 기록에 1개 부족), 리그에서 가장 많은 장타 (66개)와 총 루타 (301개)를 기록했다. 6월 10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거대한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그는 9이닝 경기에서 4연속 홈런을 때려낸 아메리칸 리그 역사상 두 번째 선수로 기록되었다. (첫 번째는 1932년의 루 게릭이었다.) 2021년 인터뷰에서 콜라비토는 이 경기를 자신의 경력 중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꼽았다. 그는 그해 처음으로 두 번 개최된 올스타 게임에 모두 선정되었으며, 두 번째 올스타 게임에서 홈런을 쳤다. 그해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 레이스에서 인디언스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5경기 뒤진 2위로 마쳤는데, 이는 그가 1967년까지 우승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때였다. 그는 또한 MVP 투표에서 4위를 차지했다. 콜라비토는 7시즌 동안 3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하며 꾸준한 거포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는 또한 평발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강한 팔을 가진 훌륭한 외야수였다.
3.3.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60년 4월 17일, 인디언스의 프랭크 레인 단장은 시즌 개막 이틀 전, 클리블랜드에서 타이거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콜라비토를 하비 퀸 (1959년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 타율 .353)과 맞트레이드하여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예상치 못하게 보냈다. 이 트레이드는 타이거스에게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으나, 가장 인기 있는 선수이자 최고의 타자를 잃은 인디언스 팬들에게는 매우 불운한 트레이드로 여겨졌다. 시즌 초반 경미한 부상이 있었던 퀸은 인디언스에서 타율 .308을 기록했지만, 그해 말에 다시 트레이드되었다. 타이거스는 콜라비토의 강한 송구 능력 때문에 그를 우익수로 배치했으며, 그 시즌 앨 칼라인을 중견수로 이동시켰다. 콜라비토는 .249의 타율, 35개의 홈런, 87개의 타점을 기록했다.
1961년, 콜라비토는 타율 .290에 개인 최고인 45개의 홈런, 140개의 타점, 129개의 득점을 기록했다. 디트로이트는 메이저 리그 전체 득점 선두를 기록했으며, 그는 MVP 투표에서 8위에 올랐다. 타이거스에서 콜라비토는 우익수에서 좌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칼라인은 우익수로 복귀했다. 콜라비토는 다시 두 번의 올스타 게임에 모두 선정되었으며, 두 번째 올스타 게임에서 홈런을 쳤다. 그 시즌 워싱턴 세너터스와의 그리피스 스타디움 더블헤더 경기 중, 그는 4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 중 3개는 두 번째 경기에서 나왔다.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의 스포츠 기자 조 폴스는 콜라비토를 "자칭 신"으로 보았고, 언론을 통해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그가 타점을 올리지 못한 상황을 기록하는 "RNBI"(Run Not Batted In, 타점 못 올린 득점)라는 통계를 만들기도 했다. 이는 콜라비토를 격분시켰고 몇 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긴장된 관계를 형성했다. 한 경기에서 공식 기록원 역할을 하던 폴스는 콜라비토에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실책을 기록했고, 경기가 끝난 후 콜라비토가 그와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또 다른 일화로, 콜라비토가 타격 부진에 빠져 타이거스 팬들이 그를 야유하기 시작하자, 그는 좌익수에서 간신히 잡은 공을 우익수 라이트 타워와 지붕 너머로 던져버리기도 했다. 1961년 5월 12일,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에서 콜라비토는 자신의 아버지를 괴롭히던 술 취한 양키스 팬을 쫓아 관중석으로 올라갔다가 메이저 리그 규정 위반으로 퇴장당했다. (콜라비토를 따라 관중석으로 올라간 다른 타이거스 선수들은 퇴장당하지 않았다.) 타이거스는 이 경기에 대해 프로테스트를 제기했고, 경기는 4대3으로 승리했다. 1961년 3.50 만 USD의 연봉을 받았던 콜라비토는 1962년 시즌에 앨 칼라인의 연봉인 3.90 만 USD~4.90 만 USD보다 더 높은 5.40 만 USD의 연봉을 요구하며 홀드아웃했고, 이는 디트로이트 팬들의 비판을 받았다. 1962년에 콜라비토는 164개의 안타(칼라인 121개), 37개의 홈런(칼라인 29개), 112개의 타점(칼라인 94개)을 기록했다. 그는 세 번째로 두 번의 올스타 게임에 모두 선정되었으며, 두 번째 올스타 게임에서 홈런을 쳤다. 1963년에는 타율 .271에 22개의 홈런과 91개의 타점을 기록했다.
3.4.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콜라비토는 1963년 11월 18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밥 앤더슨과 5.00 만 USD의 현금과 함께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이 대가로 타이거스는 제리 럼프, 데이브 위커샴, 에드 라코를 영입했다. 그는 캔자스시티에서 단 한 시즌만 보냈으며, 5.00 만 USD의 연봉으로 A's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1964년 9월 11일, 31세의 나이에 그는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300홈런 고지를 밟았는데, 이는 가장 어린 나이에 300홈런을 달성한 선수 중 한 명이었고, 동시에 900타점을 기록한 순간이기도 했다. 콜라비토는 A's에서 타율 .274, 164안타, 34홈런, 31개의 2루타, 102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또한 올스타 게임에 선정되었다. A's는 57승 105패의 기록으로 최하위에 머물렀다.
3.5.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복귀
1965년 1월, 콜라비토는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클리블랜드로 돌아왔다. 클리블랜드는 투수 토미 존 (이후 트레이드된 뒤 1989년까지 활약하며 286승을 거두었음), 외야수 토미 에이지 (1966년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신인 및 1969년 뉴욕 메츠의 최고 타자), 포수 조니 로마노를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내주었다. 화이트삭스는 포수 캠 캐리온을 클리블랜드로 보냈고, 외야수 마이크 허쉬버거, 중견수 짐 랜디스, 투수 프레드 탤벗을 캔자스시티로 보냈다.
4월 21일 홈 개막전에서 44,000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콜라비토는 등번호 21번을 달고 2점 홈런을 터뜨렸다. 그는 그 시즌 타율 .287을 기록했으며, 아메리칸 리그에서 타점(108개)과 볼넷(93개) 부문 선두를 차지한 뒤 MVP 투표에서 5위에 올랐다. 그는 리그 홈런(26개), 안타(170개), 득점(92개) 부문에서 상위 5위 안에 들었다. 또한 여덟 번째 올스타 게임에 선정되었다. 콜라비토는 클리블랜드의 162경기 전 경기에 출전하여 단 한 개의 실책도 기록하지 않았지만(274개의 수비 기회), 세 개의 아메리칸 리그 골드 글러브 상 중 하나도 받지 못했다. 9월 6일, 그는 통산 1,000번째 타점을 기록했다. 인디언스는 87승 75패의 기록으로 5위에 그쳤다.
1966년, 콜라비토는 타율 .238에 30개의 홈런과 72개의 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또한 그의 아홉 번째이자 마지막 올스타 게임에 선정되었다. 인디언스는 81승 81패의 기록으로 5위에 머물렀다. 콜라비토는 1966년 클리블랜드로부터 5.50 만 USD와 5.70 만 USD의 연봉을 받았는데, 이는 그 두 해 동안 인디언스 선수에게 지급된 최고 연봉이었다.
3.6. 다른 팀들 및 은퇴
1967년 7월 말, 콜라비토(당시 타율 .241, 5홈런, 21타점)는 인디언스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되었는데, 화이트삭스는 그 시즌 1위와 3경기 차이로 시즌을 마쳤다. 화이트삭스에서 60경기에 출전한 콜라비토는 42개의 안타, 3개의 홈런, 29개의 타점을 기록했다.
1968년 3월, 그의 계약은 화이트삭스에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팔렸다. 콜라비토는 내셔널 리그 데뷔전에서 3개의 홈런을 쳤지만, 60경기에서 타율 .204에 23개의 안타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그는 같은 해 7월 11일 다저스에서 방출되었다.
1968년 7월 15일, 콜라비토는 자유 계약 선수로 뉴욕 양키스와 계약했으며, 이는 그의 14년 메이저 리그 선수 경력의 마지막 팀이자 시즌이었다. 양키스에서 첫 타석에 들어선 그는 세너터스를 상대로 3점 홈런을 터뜨렸다. 8월 25일, 등번호 29번을 달고 있던 35세의 콜라비토는 2000년 브렌트 마인 이전까지 경기에서 승리 투수로 기록된 마지막 야수가 되었다. 그는 리그 선두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더블헤더 첫 경기에서 구원 투수로 등판하여 2와 2/3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그는 앨 칼라인과 윌리 호턴 같은 강타자들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8회에 양키스에게 결승 득점을 안겨주며 타이거스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두 번째 경기에서 홈런을 쳤다. 양키스 선수로서의 콜라비토의 투수 활약은 2012년 5월 6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크리스 데이비스가 승리 투수가 되기 전까지 아메리칸 리그에서 다시 볼 수 없었다. 콜라비토는 양키스에서 39경기에 출전하여 5개의 홈런을 포함해 20개의 안타를 기록했다. 그는 1968년 9월 30일 양키스에서 방출되었고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4. 선수 은퇴 후 경력
1972년 시즌에 콜라비토는 WJW-TV의 방송인으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고용되었다. 1973년 시즌에는 인디언스의 1루 코치를 맡았으며, 1973년 9월 21일에 그만두었다. 1975년 시즌에는 다시 방송인으로 활동했고, 1976년 시즌에는 타격 코치와 방송인을 겸했다. 1977년과 1978년 시즌에는 다시 1루 코치로 활동했다. 1982년과 1983년 시즌에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타격 코치를 맡았다.
1982년, 콜라비토는 로열스의 전 유격수이자 당시 감독이었던 딕 하우저와 함께 교통사고와 경찰과의 실랑이에 연루되었다. 콜라비토와 하우저는 경찰 방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90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둘 다 항소하여 6개월의 보호관찰을 선고받았다.
1983년, 콜라비토는 유명한 파인 타르 사건에 휘말렸다. 그는 조지 브렛의 홈런을 무효화하고 아웃을 선언하여 양키스의 승리로 이어질 심판의 결정에 항의하다가 퇴장당했다. 이 결정은 나중에 번복되었고, 경기는 한 달 뒤 브렛의 홈런으로 로열스가 앞선 채로 재개되어 로열스가 승리했다.
5. 개인 생활 및 사망
5.1. 개인 생활
콜라비토는 1954년에 전문 댄서인 카르멘 페로티와 결혼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2형 당뇨병으로 고통받았으며, 2015년 8월 11일에는 당뇨병 합병증으로 인해 오른쪽 다리 무릎 아래를 절단해야 했다.
5.2. 사망
콜라비토는 2024년 12월 10일 펜실베이니아주 번빌에 있는 자택에서 2형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91세였다.
6. 업적 및 명예
로키 콜라비토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경력 동안 다음과 같은 주요 업적과 영예를 얻었다.
- 9회 올스타 선정 (1959년 2회, 1961년 2회, 1962년 2회, 1964년, 1965년, 1966년)
- 아메리칸 리그 장타율 선두 (1958년)
- 2회 아메리칸 리그 총 루타 선두 (1959년, 1962년)
- 아메리칸 리그 홈런 선두 (1959년)
- 아메리칸 리그 타점 선두 (1965년)
- 아메리칸 리그 볼넷 선두 (1965년)
- 20홈런 시즌: 11회 (1956-1966)
- 30홈런 시즌: 7회 (1956-1962, 1964, 1966)
- 40홈런 시즌: 3회 (1958, 1959, 1961)
- 100타점 시즌: 6회 (1958, 1959, 1961, 1962, 1964, 1965)
- 100득점 시즌: 1회 (1961)
- 우익수로서 메이저 리그 수비율 선두 (1965년)
- 외야수로서 메이저 리그 수비율 선두 (1965년)
- 한 경기 4연속 홈런 (1959년)
- 2001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역사상 위대한 100명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
- 2006년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명예의 전당 헌액
7. "로키 콜라비토의 저주"
1994년, 테리 플루토는 로키 콜라비토의 저주라는 책을 출판했다. 플루토는 1980년대에 더 플레인 딜러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취재했으며, 이후 애크런 비콘 저널의 스포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가 2007년 다시 더 플레인 딜러로 복귀한 인물이다. 이 책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1959년 이후 단 한 번도 1위와 11경기 차이 이내로 들어오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플루토는 1960년 인디언스의 콜라비토 트레이드가 팀을 30년 이상 평범함의 길로 이끌었으며, 1965년 콜라비토를 다시 인디언스로 데려온 트레이드 역시 그를 내보냈던 트레이드만큼이나 나쁜 결정이었다고 주장했다.
플루토는 1995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41년 만에 처음으로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한 후, 속편인 저주를 묻다를 출판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그 시즌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게 월드 시리즈에서 4대2로 패배했다. 1997년에 인디언스는 다시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를 우승했지만,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단 두 아웃만 남겨두고 우승을 놓치며 4대3으로 패했다. 1999년, 플루토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역사를 다룬 책 우리의 부족을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여전히 저주가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인디언스는 19년 뒤인 2016년에도 다시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시카고 컵스에게 월드 시리즈에서 4대3으로 패하며 우승을 놓쳤다. 클리블랜드의 마지막 월드 시리즈 우승은 1948년으로, 당시 보스턴 브레이브스를 꺾었다.
8. 유산 및 평가
로키 콜라비토는 당대 가장 인기 있는 거포이자 외야수 중 한 명이었으며, 야구계에서 가장 강력한 송구 능력을 가진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2001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올-센추리 팀' 소개 행사에서 콜라비토는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2006년 7월 29일, 콜라비토는 레이 채프먼, 애디 조스, 샘 맥도웰, 앨 로젠, 허브 스코어, 그리고 감독 앨 로페즈와 함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21년 8월 10일, 그의 88번째 생일에 클리블랜드의 리틀 이탈리아 토니 브러시 공원에서 콜라비토의 동상이 공개되었다. 콜라비토는 이 제막식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