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로버트 2세(Robert II영어, 1316년 3월 2일 ~ 1390년 4월 19일)는 1371년부터 1390년 사망할 때까지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다. 그는 제6대 스코틀랜드 대궁내관 월터 스튜어트와 로버트 1세의 딸 마저리 브루스의 아들로, 스튜어트 왕조의 첫 번째 군주이다. 로버트는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복잡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며, 젊은 시절부터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하고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서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치세는 데이비드 2세 국왕의 포로 생활과 몸값 협상, 그리고 잉글랜드와의 국경 분쟁 등 여러 도전 과제를 안고 있었다. 로버트 2세는 왕위에 오른 후 스튜어트 가문의 권력을 강화하고 왕실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으나, 노년에는 건강 문제와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통제력을 상실하고 사실상 통치권을 위임해야 했다. 그는 1390년 둔도널드 성에서 사망했으며, 스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로버트 2세의 통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초기에는 비판적이었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그의 업적과 치세의 안정성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로버트 스튜어트는 1316년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마저리 브루스는 로버트 1세의 딸이었고, 아버지는 제6대 스코틀랜드 대궁내관 월터 스튜어트였다. 마저리는 로버트 출생 직후인 1317년경 낙마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버트는 뷰트섬, 클라이드사이드, 렌프루에 있는 스튜어트 가문의 영지에서 게일족 귀족의 양육을 받았다.
2.1. 부모와 계승권
1315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로버트 1세의 동생인 에드워드 브루스를 왕위 계승자로 지정하며 마저리 브루스의 계승권을 취소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브루스가 1318년 10월 14일 아일랜드 던독 근처 포가트 전투에서 사망하자, 의회는 그해 12월 급히 새로운 계승법을 제정하여 로버트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마저리의 아들 로버트 스튜어트가 계승자임을 명시했다.
하지만 1324년 3월 5일 로버트 1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엘리자베스 드 버러 사이에서 아들 데이비드 2세가 태어나면서 로버트 스튜어트의 추정 상속인 지위는 상실되었다. 1327년 4월 9일 아버지 월터 스튜어트가 사망하자 로버트는 스코틀랜드 대궁내관 직위를 계승했다. 같은 해 의회는 데이비드 2세가 자식 없이 사망할 경우 로버트 스튜어트가 다시 계승자가 될 것임을 재확인했다. 1329년 로버트 1세가 사망하고 5세의 아들 데이비드가 데이비드 2세로 즉위했으며,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의 보호 아래 놓였다.
2.2. 가계
스튜어트 가문의 이름은 1150년 초대 월터 피츠앨런이 데이비드 1세로부터 스코틀랜드 왕실 대궁내관(Lord High Steward)으로 임명된 후 대대로 이 직책을 세습하면서 그 직명인 '스튜어드(Steward)'에서 유래했다. 훗날 메리 여왕이 프랑스식으로 철자를 스튜어트(Stuart)로 변경했다.
로버트 2세의 혈통은 스코틀랜드의 주요 왕가와 귀족 가문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 마저리 브루스는 스코틀랜드의 영웅적인 왕 로버트 1세의 딸이었고, 아버지는 유서 깊은 스튜어트 가문의 수장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중요한 정통성을 부여했다.
3. 초기 경력 및 분쟁
데이비드 2세의 즉위는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을 촉발시켰고, 이는 로버트의 계승권에 위협이 되었다.
3.1. 스코틀랜드 대궁내관
아버지가 사망한 1327년, 11세의 로버트는 고아가 되어 삼촌인 더리스디어의 제임스 스튜어트 경의 보호를 받았다. 제임스 스튜어트 경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와 세인트앤드루스 부주교 윌리엄 린제이와 함께 왕국의 공동 수호자로 임명되었다.
3.2.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및 섭정
존 발리올 국왕의 통치 기간에 시작된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은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종주권 주장으로 인해 복잡해졌다. 스코틀랜드 지도부는 전쟁만이 잉글랜드 국왕의 발리올 주권 약화를 막을 수 있다고 결론 내리고 1295년 10월 프랑스와 상호 지원 조약을 체결했다. 1296년 3월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를 침공했고, 이는 잉글랜드 국왕의 분노를 사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침공을 유발했다. 잉글랜드군은 3월 30일 베릭어폰트위드를 점령하고 4월 27일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다. 존 발리올은 에드워드에게 항복하고 왕위를 포기한 후 런던으로 포로로 보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월리스와 앤드루 모레이가 존 발리올 국왕의 이름으로 잉글랜드에 대한 저항을 이끌었다. 그들이 사망한 후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에 계속 저항하여 결국 에드워드 2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스코틀랜드 왕위를 차지했다.
1332년 존 발리올의 아들 에드워드 발리올은 에드워드 3세의 암묵적인 지지와 "권리 박탈자들"의 명시적인 지지 아래 브루스 왕조의 주권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에드워드 발리올의 군대는 1332년 8월 11일 더플린 무어 전투와 1333년 7월 19일 할리돈 힐 전투에서 브루스 지지자들에게 큰 패배를 안겼다. 17세의 로버트는 할리돈 힐 전투에 참전했다. 발리올은 로버트의 영지를 점령하고 이를 데이비드 3세 스트래스보기에게 부여했지만, 로버트는 포로로 잡히지 않고 덤바턴 성에서 피난처를 얻었다. 그곳에서 데이비드 국왕도 피난하고 있었다. 1333년 겨울에는 스코틀랜드군의 손에 남아있는 요새가 거의 없었다. 오직 킬드럼미 성, 로클리븐 성, 로크둔, 그리고 어크하트 성만이 발리올 군대에 맞서 버텼다.

1334년 5월, 브루스 가문의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피신했다. 로버트는 스코틀랜드 서부의 영지를 되찾기 시작했다. 스트래스보기는 동료 "권리 박탈자들"과의 불화 끝에 브루스 가문의 편으로 돌아섰으나, 랜돌프와의 격렬한 반목은 1335년 초 데어시 성에서 열린 의회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 의회에서 스트래스보기는 로버트의 지지를 받았다. 스트래스보기는 8월에 다시 잉글랜드 국왕에게 복종하며 스코틀랜드의 수호자가 되었다. 로버트는 1335년 9월 에드워드에게 복종하며 12월 초까지 수호자직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1335년에는 발리올에 대한 브루스의 저항이 거의 붕괴 직전이었지만, 컬블린 전투에서 앤드루 모레이 경이 강력한 전쟁 지도자로 등장하면서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모레이는 1332년에 포로로 잡혔다가 1334년에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후, 즉시 북쪽으로 달려가 헨리 드 보몽 경이 점거하고 있던 부한의 던다그 성을 포위했고, 성은 1334년 12월 23일에 함락되었다. 모레이는 1335-1336년 겨울 동안 던펌린에서 수호자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파이프의 쿠파 성을 포위했다. 그는 1338년 아보크 성에서 사망했으며, 로버트가 다시 수호자 직을 맡았다. 모레이의 작전은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 남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끝냈고, 에드워드가 던바 성을 6개월간 포위하는 데 실패하면서 이는 더욱 확실해졌다. 발리올은 많은 주요 지지자들을 브루스 편으로 잃었고, 주요 잉글랜드 수비대들은 스코틀랜드군에게 함락되기 시작했다. 쿠파는 1339년 봄 또는 여름에, 퍼스는 1339년 6월 윌리엄 더글러스 경과 로버트 스튜어트, 드럼사르가드의 모리스 머레이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에든버러는 1341년 4월 리데스데일의 윌리엄 더글러스에 의해 계략으로 점령되었다.

존 랜돌프는 1341년 포로 교환으로 잉글랜드 구금에서 풀려나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기 전 노르망디에서 데이비드 2세를 방문했다. 랜돌프가 국왕의 총애를 받았듯이, 데이비드 2세는 추정 상속인이자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라는 강력한 지위를 가진 로버트 스튜어트를 불신했다. 1341년 6월 초, 왕국은 국왕이 귀국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안정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귀족들은 브루스 대의를 위해 싸우면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상당히 확장했다. 1346년 10월 17일, 로버트는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데이비드와 함께 참전했는데, 랜돌프를 포함한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사망했다. 데이비드 2세는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지만, 로버트와 마치 백작 패트릭은 전장을 탈출하거나 도망쳤다.
3.3. 데이비드 2세 국왕의 포로 생활과 몸값 협상
국왕이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히고 랜돌프가 사망하자, 수호자 직위는 다시 로버트에게 돌아갔다. 1347년 그는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엘리자베스 뮤어와의 교회법적 혼인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을 통해 자신의 네 아들(장남 로버트 3세가 될 캐릭 백작 존, 파이프 영주 월터 스튜어트,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 부한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과 여섯 딸의 적법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잉글랜드의 포로였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 2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로버트의 수호자 직위는 의회에 의해 해제되었고, 마 백작, 로스 백작, 더글러스 영주에게 공동으로 주어졌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하고 1352년 2월 의회에서 로버트가 다시 수호자로 임명되었다. 가석방된 데이비드는 이 의회에 참석하여 로버트와 삼부회 의원들에게 자신의 석방 조건을 제시했다. 이 조건에는 몸값 요구는 없었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 왕자 곤트의 존을 추정 상속인으로 지명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로버트는 자신의 계승권을 위협하는 제안에 반대하여 의회는 이 조건을 거부했다. 국왕은 다시 포로 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헨리 나이튼은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국왕이 잉글랜드의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그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자신들도 잉글랜드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들은 국왕에게 포로 기간 동안 그들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상해, 그리고 모든 범죄를 용서하고 이에 대한 보증을 해주지 않는 한 그를 몸값으로 데려오거나 몸값을 지불하게 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다른 왕을 선출하여 자신들을 통치하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354년까지 국왕의 석방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어, 9년 동안 90,000 marks의 몸값을 지불하고 20명의 고위 인질을 제공하는 조건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로버트가 1355년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잉글랜드 공격 동맹을 맺으면서 이 합의는 파기되었다. 베릭어폰트위드의 점령과 프랑스군이 잉글랜드 영토에 주둔하면서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1356년 1월, 에드워드는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 남동부로 진격하여 에든버러와 해딩턴을 불태우고 로디언 지역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는데, 이 작전은 "불타는 성촉절"로 알려지게 되었다.
9월 에드워드가 프랑스에 승리한 후, 스코틀랜드는 데이비드의 석방을 위한 협상을 재개하여 1357년 10월 베릭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조약의 조건은 데이비드의 자유를 대가로 10년 동안 연간 분할로 100,000 marks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두 번의 지불만 완료되었고, 1366년까지 더 이상 지불되지 않았다. 베릭 조약 조건을 이행하지 못하자 에드워드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후계자를 데이비드의 후계자로 계속 주장할 수 있었는데, 이 조건은 스코틀랜드 의회와 아마도 로버트 자신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는 1363년 로버트와 더글러스 백작, 마치 백작에 의한 짧은 반란의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이후 프랑스의 유인책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는 그들을 돕지 않았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평화를 유지했다.
4.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의 치세
4.1. 즉위와 권력 강화
데이비드 2세는 1371년 2월 22일 자식 없이 사망했고, 로버트 2세가 그 뒤를 이었다. 데이비드는 거의 즉시 홀리루드 수도원에 안장되었지만, 윌리엄 더글러스 백작의 무장 시위로 인해 로버트 2세의 대관식은 1371년 3월 26일까지 지연되었다. 이 사건의 원인은 불분명하지만, 로버트의 계승권에 대한 분쟁과 관련이 있거나, 마치 백작 조지 던바와 남부 재판관 로버트 어스킨을 겨냥한 것일 수 있다. 이 문제는 로버트가 자신의 딸 이사벨라를 더글러스의 아들 제임스와 결혼시키고, 더글러스가 포스 남부의 재판관으로 어스킨을 대신하면서 해결되었다. 로버트의 즉위는 데이비드 2세로부터 관직을 맡고 있던 일부 다른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지 던바의 동생인 파이프 영주 존 던바는 파이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잃었고, 로버트 어스킨 경의 아들 토머스 어스킨 경은 에든버러 성의 통제권을 잃었다.
스튜어트 가문은 서부, 아솔, 그리고 북부 지역에서 영지를 크게 늘렸다. 파이프 백작령과 멘티스 백작령은 로버트의 두 번째 생존 아들인 로버트에게 돌아갔고, 부한 백작령과 로스 백작령(바데노크 영주령과 함께)은 그의 네 번째 아들인 알렉산더 스튜어트에게, 그리고 스트래선 백작령과 케이스니스 백작령은 그의 두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장남 데이비드에게 돌아갔다. 로버트 국왕의 사위들은 아일의 존, 모레이 백작 존 던바, 그리고 제2대 더글러스 백작 제임스였다. 로버트의 아들인 왕위 계승자 캐릭 백작 존과 파이프 백작 로버트는 각각 에든버러 성과 스털링 성의 성주가 되었고, 바데노크와 로스의 영주이자 나중에 부한 백작이 된 알렉산더는 왕국의 북부에서 국왕의 재판관이자 부관이 되었다.
스튜어트 가문의 이러한 권력 증강은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 불만을 야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왕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영토나 지역 통치를 위협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들에게 작위가 이전된 경우에도 해당 개인들은 대개 매우 잘 보상받았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그의 전임자와는 매우 달랐다. 데이비드는 귀족들을 지배하려 했던 반면, 로버트의 전략은 강력한 아들들과 백작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었고, 이는 그의 통치 첫 10년 동안 일반적으로 잘 작동했다. 로버트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거나 딸들을 강력한 영주들과 전략적으로 결혼시킴으로써 15개 백작령 중 8개에 영향을 미쳤다.
1373년, 로버트는 의회에서 계승에 관한 상속법을 통과시켜 스튜어트 왕조의 미래 안보를 확보했다. 당시 그의 아들 중 아무도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각 아들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상황을 정확히 정의하는 시스템을 고안할 필요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장자 상속에 의한 정상적인 계승보다 우선하지 않았다. 1375년까지 국왕은 존 바버에게 시 더 브루스를 쓰도록 의뢰했는데, 이는 스튜어트 가문이 로버트 1세의 진정한 상속자임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역사서였다. 이 시는 제임스 더글러스 경과 국왕의 아버지인 대궁내관 월터가 브루스를 지지했던 애국적인 행위를 묘사했다. 로버트의 1370년대 통치 기간 동안 국가 재정은 안정되고 크게 개선되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번성하는 양모 무역, 공공 재정 지출 감소, 그리고 에드워드 3세 사망 후 전임 국왕의 몸값 지불 중단 덕분이었다. 로버트는 주로 로디언에 기반을 둔 데이비드 2세와 달리 왕국의 한 지역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게일족 영주들 사이에서 북부와 서부의 더 외딴 지역들을 자주 방문했다.
로버트는 국경 내에 잉글랜드 영토가 여전히 존재하고, 잉글랜드 국왕에게 충성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있는 나라를 통치했다. 베릭, 제드버러, 로크마벤, 록스버러의 중요한 성채에는 잉글랜드 수비대가 주둔하며 남부 베릭셔, 티비오트데일, 그리고 애넌데일과 트위드데일의 넓은 지역을 통제했다. 1371년 6월, 로버트는 프랑스와 방어 조약을 체결했고, 1372년 동안 직접적인 적대 행위는 없었지만, 잉글랜드 수비대들은 강화되고 경계 태세가 강화되었다. 로버트의 거의 확실한 지원을 받은 잉글랜드 점령 지역에 대한 공격은 1373년에 시작되어 1375-77년 동안 가속화되었다. 이는 이전의 국경 남작들에 의한 소규모 약탈 공격보다는 갈등의 확대를 위한 중앙 결정이 내려졌음을 시사한다. 1376년, 마치 백작은 애넌데일을 성공적으로 회복했지만, 브뤼헤의 잉글랜드-프랑스 휴전으로 인해 제약을 받았다.

에드워드 3세와의 협상에서 로버트는 국경 영주들에게 잉글랜드 지역에 대한 공격이 확대되는 책임을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는 재탈환한 영지를 유지했으며, 종종 소규모 영주들에게 분배하여 잉글랜드의 재점령을 막는 데 그들의 이익을 확보했다. 로버트가 국경 영주들을 추가로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1377년 에드워드 3세 사망 이후 스코틀랜드의 성공적인 군사 행동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든 징후는 로버트가 이를 지지했음을 나타냈다. 1378년 7월 25일자 헌장에서 국왕은 콜딩엄 수도원이 더 이상 잉글랜드 더럼 수도원의 지부가 아니며 던펌린 수도원에 부속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2월 초, 스코틀랜드인들은 1384년 1월 26일에 스코틀랜드가 휴전에 포함된 잉글랜드-프랑스 휴전이 체결된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잉글랜드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로크마벤 성과 티비오트데일을 되찾았다. 곤트의 존은 상응하는 잉글랜드의 반격을 이끌고 에든버러까지 진격했지만, 시민들이 그에게 뇌물을 주어 도시를 해치지 않고 떠나게 했다. 그러나 해딩턴은 파괴되었다.
캐릭과 제임스 더글러스 백작(그의 아버지 윌리엄은 4월에 사망했다)은 곤트의 습격에 대한 보복 공격을 원했다. 로버트는 프랑스가 1383년에 지원을 보내기로 한 이전 합의를 파기하고 잉글랜드와 휴전을 맺었으므로, 어떤 군사 행동도 보복과 다가올 불로뉴 평화 회담에서의 배제로 이어질 것이라고 결론 내렸을 수 있다. 1384년 6월 2일, 로버트는 글래스고 주교 월터 워드루를 잉글랜드-프랑스 평화 회담에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캐릭은 이를 무시하고 잉글랜드 북부로의 습격을 허용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7월 26일까지 스코틀랜드는 10월에 만료될 휴전에 참여했다. 로버트는 9월에 아마도 휴전이 끝났을 때 어떻게 진행할지 결정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다.
4.2. 권력 상실과 말년
로버트의 아들 캐릭 백작 존은 포스 남부에서 가장 중요한 스튜어트 귀족이 되었고, 부한 백작 알렉산더는 북부에서 그러했다. 알렉산더의 활동과 게일족 용병에 의해 강제된 왕실 행정 방식은 북부 백작들과 주교들, 그리고 그의 이복동생인 스트래선 백작 데이비드 스튜어트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불만은 의회 내에서 국왕의 입지를 손상시켰고, 부한의 활동을 억제하는 국왕의 능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전쟁 수행에 대한 캐릭 파벌과의 로버트의 의견 차이와 북부의 부한을 처리하는 데 대한 그의 지속적인 실패 또는 의지 부족은 1384년 11월의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졌다. 이때 의회는 국왕의 통치 권한을 박탈하고 캐릭을 왕국의 부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로버트가 밀려나면서 전쟁에 방해가 될 것이 없었다. 1385년 6월, 1200명의 프랑스 병력이 더글러스 백작과 로버트의 두 아들인 캐릭 백작 존, 파이프 백작 로버트가 참여한 스코틀랜드군 작전에 합류했다. 소규모 교전에서 약간의 이득이 있었지만, 프랑스군과 스코틀랜드군 사령관들 사이의 다툼으로 인해 중요한 록스버러 성 공격이 포기되었다.
1388년 8월 노섬벌랜드의 오터번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군에게 승리하면서 캐릭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군 사상자 중 한 명은 캐릭의 측근인 제임스 더글러스 백작이었다. 더글러스는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작위와 영지에 대한 여러 주장이 제기되었다. 캐릭은 더글러스의 누이의 남편인 맬컴 드러먼드를 지지했고, 파이프는 더글러스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가진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지지했다. 파이프는 이제 강력한 더글러스 동맹과 국왕을 지지하는 이들과 함께 12월 의회 회의에서 반대 쿠데타를 성공시켰고,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직위는 캐릭(최근 말에 차여 심하게 다쳤다)에서 파이프로 넘어갔다. 많은 이들이 파이프가 북부의 무법 상태, 특히 그의 이복동생 부한의 활동을 제대로 해결하려는 의도를 지지했다. 파이프는 부한에게 북부의 부관 및 포스 북부의 재판관 직위를 해제했다. 후자의 역할은 파이프의 아들 머독 스튜어트에게 주어졌다. 로버트 2세는 1390년 1월 말 북동부를 순회했는데, 아마도 부한이 권력에서 물러난 후 북부의 변화하는 정치 상황을 강화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3월, 로버트는 에어셔의 둔도널드 성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4월 19일 사망했다. 그는 4월 25일 스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5. 혼인과 자녀
5.1. 첫 번째 혼인과 자녀
로버트 2세는 1336년 로월런의 아담 뮤어 경의 딸 엘리자베스 뮤어(1355년 사망)와 처음 결혼했다. 이 결혼은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에 그는 1347년 교황의 허가를 받은 후 1349년에 다시 결혼했다.
이 결혼을 통해 열 명의 자녀가 성인이 되었다.
- 존(1406년 사망):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3세가 되었으며, 애너벨라 드러먼드와 결혼했다.
- 파이프 영주 월터 스튜어트(1362년 사망): 파이프 여백작 이사벨라 맥더프의 남편이었다.
-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 파이프 백작이자 1398년부터 올버니 공작이 되었다(1420년 사망). 1361년 멘티스 여백작 마거릿 그레이엄과 결혼했고, 1381년 두 번째 아내 무리엘라 키스(1449년 사망)와 결혼했다.
- 부한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1405년 사망): "바데노크의 늑대"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1382년 로스 여백작 유페미아 1세와 결혼했다.
- 마거릿: 아일의 존과 결혼했다.
- 마저리: 모레이 백작 존 던바와 결혼했고, 이후 알렉산더 키스 경과 결혼했다.
- 엘리자베스: 스코틀랜드 대군사관 토머스 드 라 헤이와 결혼했다.
- 이사벨(1410년 사망): 제2대 더글러스 백작 제임스(1388년 사망)와 결혼했고, 1389년 존 에드먼스턴과 재혼했다.
- 조안나(진): 존 키스 경(1375년 사망)과 결혼했고, 이후 글래미스 영주 존 라이언(1383년 사망)과 결혼했으며, 마지막으로 제임스 샌딜랜즈 경과 결혼했다.
- 캐서린: 그루거와 레스탈리그의 로버트 로건 경과 결혼했다.
5.2. 두 번째 혼인과 자녀
1355년, 로버트는 로스 백작 휴의 딸 유페미아 드 로스(1387년 사망)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그들은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 스트래선 백작 데이비드 스튜어트: 1356년경 태어나 1389년에 사망했다.
- 아솔 백작 월터 스튜어트: 1360년경 태어나 1437년 제임스 1세 암살에 연루되어 에든버러에서 참수되었다.
- 크로퍼드 여백작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1380년 제1대 크로퍼드 백작 데이비드 린제이와 결혼했다.
- 에기디아: 1387년 니스데일의 윌리엄 더글러스와 결혼했다.
5.3. 사생아
로버트 2세는 또한 많은 사생아들을 두었다.
마리오타 드 카데니(존 카데니 경의 딸이자 알렉산더 맥노턴의 미망인)와의 사이에서:
- 인버루난의 알렉산더 스튜어트
- 카데니의 존 스튜어트 경
- 애버네시와 킨펀스의 제임스 스튜어트
- 월터 스튜어트
모이라 레이치와의 사이에서(전통에 따르면):
- 뷰트의 존 스튜어트 경(1360년 ~ 1445/9년): 뷰트 후작 가문의 조상.
어머니가 알려지지 않은 다른 자녀들:
- 벌리의 존 스튜어트 영주(1425년 사망)
- 글래스고의 알렉산더 스튜어트(성직자)
- 인버루난의 알렉산더 스튜어트 경
- 토머스 스튜어트: 세인트앤드루스 부주교이자 던켈드의 학장
- 킨펀스의 제임스 스튜어트
- 월터 스튜어트
- 마리아 또는 메리 스튜어트: 존 드 다니엘스턴 경의 아내이자 로버트 드 다니엘스턴 경의 어머니(킬마우르스의 커닝햄과 칼더우드의 맥스웰 가문의 조상).
6. 역사 서술 및 평가
로버트 2세의 통치는 고든 도널드슨(1967)과 래널드 니콜슨(1974)의 연구 이후 재평가를 받았다. 도널드슨은 로버트의 통치에 대한 지식 부족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통치 시기와 가까운 시기에 글을 쓴 초기 연대기 작가들이 비판할 만한 점을 거의 찾지 못했음을 언급했다. 도널드슨은 로버트가 왕위에 오르기 전후의 경력을 "적어도 평범했으며, 그의 통치가 이를 더 빛내지도 못했다"고 묘사했다. 도널드슨은 교황의 허가 이후 로버트와 엘리자베스 뮤어의 교회법적 결혼의 합법성을 논했지만, 1371년과 1372년의 계승법이 의회에서는 문제를 종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뮤어와 유페미아 로스의 후손들 간의 세대 간 불화는 끝나지 않았음을 인정했다。도널드슨에 따르면, 로버트가 할리돈과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 참여했던 경험은 그가 잉글랜드에 대한 군사 원정을 승인하는 것을 경계하게 만들었고, 그의 남작들에 의한 그러한 행동은 그에게 숨겨졌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니콜슨은 로버트의 통치를 미흡하다고 묘사했으며, 그의 통치 능력 부족이 내부 분쟁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니콜슨은 로버트의 대관식 직전 무장 시위를 벌인 더글러스 백작이 매수되었으며, 이를 엘리자베스 뮤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로버트의 아들들의 적법성에 대한 의혹과 연관시켰다.
스티븐 보드먼(2007), 알렉산더 그랜트(1984, 1992), 마이클 린치(1992)와 같은 역사가들은 로버트 2세의 삶에 대해 더 균형 잡힌 평가를 내린다. 현대 역사가들은 특히 그의 통치 첫 10년 동안 스코틀랜드 왕국이 더 부유하고 안정되었다고 본다. 보드먼은 로버트 2세가 대궁내관 시절에는 데이비드 2세의 추종자들로부터 그의 부관으로서의 행동을 "폭정"으로 비난하는 부정적인 선전에 시달렸고, 나중에는 국왕이 되어서도 그의 아들 캐릭 백작 존의 지지자들로부터 로버트가 추진력과 업적이 부족하며 나이 들어 통치하기에 부적합한 왕이라고 비난받았다고 설명한다.
로버트 2세와 게일족 스코틀랜드의 연관성 또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서부의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서 자랐고, 게일어와 문화에 완전히 익숙했으며, 헤브리디스 제도, 상부 퍼스셔, 아길의 게일족 영주들과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통치 기간 내내 로버트는 게일족의 중심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으며, 당시 로우랜드 스코틀랜드의 불만은 국왕이 게일족 문제에 너무 많이 개입한다는 견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보드먼은 또한 로버트 2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의 상당 부분이 프랑스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의 기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프루아사르는 "[국왕은] 붉고 충혈된 눈을 가졌고, 백단향 색깔이었는데, 이는 그가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 집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사람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기록했다. 프루아사르의 견해와 달리, 초기 스코틀랜드 연대기 작가들인 앤드루 오브 윈타운과 월터 바우어(두 사람 모두 로버트 2세와 거의 동시대의 자료를 활용했다)와 이후 15세기와 16세기 스코틀랜드 연대기 작가 및 시인들은 "로버트 2세를 스코틀랜드의 애국 영웅, 스코틀랜드 왕국의 통합 수호자, 그리고 로버트 1세의 직계 후계자"로 묘사했다.
그랜트(1992)는 로버트 2세의 통치가 대외 및 국내 정책 면에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지는 않았다"고 인정한다. 로버트의 대관식 직전 무장 시위를 벌인 윌리엄 더글러스 백작의 반응에 대해 그랜트는 더글러스가 로버트의 정당한 왕위 계승권에 반대하여 시위한 것이 아니라, 왕실의 후원이 데이비드 2세 시대처럼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고 본다. 그랜트는 또한 이 시위가 로버트의 전임자로부터 에든버러, 스털링, 덤바턴 성을 소유했던 로버트와 토머스 어스킨 부자를 겨냥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랜트는 프루아사르의 기록이 로버트 2세의 통치에 대한 효과적인 자료로서의 신뢰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캐릭이 이끄는 영향력 있는 귀족 연합은 국왕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1384년 11월 의회를 조작하여 로버트 2세를 실질적인 권력에서 제거했다. 그랜트는 로버트의 노쇠함에 큰 비중을 두지 않으며, 1388년 캐릭의 폐위와 이어진 1389년 잉글랜드-프랑스 휴전 참여 결정이 모두 로버트 2세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고 시사한다. 그러나 권한은 로버트 2세에게 다시 넘어가지 않고 캐릭의 동생인 파이프 백작 로버트에게 넘어갔으며, 이는 국왕이 다시 아들 중 한 명의 처분에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타운과 바우어가 의존했던 알려지지 않은 자료는 파이프가 국정 문제에 대해 아버지에게 양보했으며, 이는 두 아들의 수호자 역할 스타일의 차이를 강조한다고 지적했다.
마이클 린치는 로버트 2세의 통치 기간인 1371년부터 1384년 캐릭의 부관직까지가 지속적인 번영과 안정으로 특징지어졌다고 지적한다. 수도원장 바우어는 이 시기를 "평온, 번영, 평화"의 시기로 묘사했다. 린치는 1450년대 제임스 2세와 더글러스 가문 사이의 문제(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로버트 2세의 강력한 영주권 장려 정책의 유산으로 해석했다)가 데이비드 2세 시대부터 국경 지대와 갤러웨이 지역 영주들의 권력 증강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로버트는 더글러스와 스튜어트 백작들이 그들의 봉토에서 통치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으로 만족했다. 린치는 정부의 약화가 1384년 쿠데타 이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발생했으며, 쿠데타의 근본 원인은 로버트 2세가 그의 셋째 아들인 부한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바데노크의 늑대"로 알려짐)를 편애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7. 허구적 묘사
로버트 2세는 역사 소설에 묘사되었다.
- 인간의 세 가지 위험; 또는 전쟁, 여성, 그리고 마법 (1822)은 제임스 호그의 작품이다. 이 이야기는 로버트 2세의 통치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그의 "나라는 잉글랜드 국경에 인접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행복과 평화를 누렸다." 이야기의 일부는 린리스고 궁전에서 진행되는데, 로버트는 자신의 딸 마거릿 스튜어트를 "잉글랜드의 손에서 록스버러 성을 탈환할 기사"에게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한다. 마거릿은 자신의 조건을 추가하는데, "만약 그가 그 일을 시도하고 실패하면, 그는 자신의 모든 땅, 성, 도시, 탑을 나에게 몰수당할 것이다." 자원자가 없는 상황에서 마거릿은 직접 성을 탈환하겠다고 맹세하며, 머스그레이브 영주와 그의 정부 제인 하워드를 물리친다.
- 혼돈의 영주들 (1976)은 나이절 트랜터의 작품이다. 이 소설은 1388년부터 1390년까지의 사건을 다루며, 로버트 2세의 마지막 해와 로버트 3세의 즉위를 묘사한다. 노쇠한 국왕이 "허약하고 지쳐 반쯤 눈이 멀게" 되자, 그의 아들, 딸, 그리고 다른 귀족들이 권력을 위해 다툰다. 통제되지 않는 스코틀랜드는 그들의 갈등으로 황폐해진다.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와 부한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 총애를 얻기 위해 (2000)는 나이절 트랜터의 작품이다. 모레이 백작 존 던바가 데이비드 2세와 로버트 2세의 궁정에서 활동한 경력을 다룬다. 존은 로버트 2세의 사위이자 외교관으로 그를 섬긴다.
8. 사망
로버트 2세는 1390년 4월 19일 에어셔의 둔도널드 성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4월 25일 스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그의 사망 이후 왕위는 그의 장남인 캐릭 백작 존이 물려받아 로버트 3세로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