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레지날드 에드가 워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1. 출생 및 어린 시절
워커는 1889년 3월 16일 식민지 나탈의 더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그는 일찍이 육상에 재능을 보였다.
2. 육상 경력
레지날드 에드가 워커의 육상 경력은 1907년 남아프리카 챔피언십 우승을 시작으로 1908년 런던 올림픽 100미터 달리기 금메달이라는 정점을 찍었다.
2.1. 남아프리카 선수권 대회
워커는 1907년 남아프리카 선수권 대회에서 챔피언에 오르며 국내 육상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우승은 그가 1908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2.2. 1908년 런던 올림픽
1908년 런던 올림픽은 레지날드 에드가 워커의 육상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는 이 대회에서 100미터 달리기 금메달을 획득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2.2.1. 여정 및 준비
워커는 1908년 런던 올림픽 100미터 달리기에서 우승 후보로 거론되지 않았다. 심지어 런던으로 향하는 데 필요한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했다. 다행히 나탈의 한 스포츠 기자가 워커의 여비를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모금하여 그가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에 도착한 그는 훗날 해럴드 에이브러햄스의 코치로도 유명해지는 샘 머사비니의 지도를 받으며 훈련에 매진했다.
2.2.2. 올림픽 레이스
워커는 올림픽 100미터 경기에서 예선부터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예선에서는 11.0초의 기록으로 비교적 쉽게 승리하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는 미국의 윌리엄 W. 메이를 간발의 차이로 제치고 10.8초로 올림픽 기록과 동률을 이루며 결승에 진출했다. 당시 여러 유명 선수들이 결승에 오르지 못했지만, 워커는 당당히 결승 무대를 밟았다. 결승전은 워커를 포함한 세 명의 북미 선수들과의 대결로 펼쳐졌다. 특히 준결승에서 워커와 같은 10.8초의 기록을 세웠던 미국의 제임스 렉터와의 치열한 승부가 예상되었다. 워커는 출발과 동시에 빠르게 선두로 나섰으나, 중반을 넘어서면서 렉터가 따라붙어 나란히 달렸다. 그러나 워커는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해 약 1.5걸음 차이로 렉터를 앞서며 우승을 차지했다.

2.2.3. 우승 및 기록
레지날드 에드가 워커는 1908년 런던 올림픽 100미터 달리기 결승에서 10.8초의 기록으로 다시 한번 올림픽 기록과 동률을 이루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우승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올림픽에서 획득한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그는 당시 19세 128일의 나이로 올림픽 100미터 달리기에서 우승한 최연소 선수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2021년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3. 군 복무
레지날드 에드가 워커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조국을 위해 참전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제7보병대 소속으로 복무했다. 이후 1917년에는 남아프리카 해외 원정군에 합류하여 프랑스의 서부 전선에서 복무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머리에 총상을 입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워커는 1919년에 육군에서 제대했다.
4. 후기 생애
군 복무를 마친 레지날드 에드가 워커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제대 후 케냐 식민지의 나이로비에 있는 '로프스 앤 매팅스'(Ropes & Mattings영어)에서 서기로 일했다. 이후 다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5. 유산
레지날드 에드가 워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육상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선구자로 기억된다. 그는 올림픽 100미터 달리기 최연소 챔피언이자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그 업적이 계속해서 기려지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재정적 어려움과 전쟁의 시련을 극복하고 스포츠를 통해 국가적 영광을 안겨준 인물로서 남아프리카 육상계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