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의 생애는 그의 명망 있는 가문 배경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로마 귀족 사회의 중심에서 성장하며 유년기부터 주요 정치인들과 교류했고, 카이사르에게는 아들처럼 깊은 신뢰를 받았으나, 결국 그의 암살에 가담하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1.1. 출생 및 가계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기원전 81년 4월 27일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으며, 일부에서는 기원전 84년 또는 기원전 85년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의 아버지는 기원전 77년에 집정관을 지낸 동명의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이고, 어머니는 카틸리나의 음모에 가담했던 것으로 유명한 셈프로니아이다. 하지만 로널드 심은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가문과 양자 관계뿐 아니라 혈연으로도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셈프로니아가 아닌 포스투미아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제기했으나, 이 가설은 학계에서 큰 지지를 얻지 못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명망 있는 가문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부 모두 집정관을 지낸 바 있다. 그의 어머니는 민중파 개혁가였던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그는 또한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라는 파트리키에 의해 양자로 입양되었는데, 이 가문은 고대 귀족 가문 중에서도 마지막까지 명성을 유지했던 가문 중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이 양아버지는 기원전 81년에 독재관 술라를 위해 화폐를 주조했던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로 알려져 있다. 비록 일부 고대 문헌에서는 데키무스를 '알비누스'로 지칭하고 그 자신이 발행한 일부 주화에도 그 이름이 나타나지만, 그는 관례에 따라 이름을 바꾸지 않았으며 동시대인들은 공식적인 맥락에서도 그를 본명으로 불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여러 차례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아들처럼 사랑한다고 표현했다. 로마 역사가 아피아노스는 카이사르의 이 언급을 데키무스에 대한 사실상의 양자 입양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실제로 로널드 심은 카이사르의 친아들이 암살자 '브루투스' 중 한 명이었다면 마르쿠스 브루투스보다 데키무스 브루투스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는 데키무스가 제2순위 상속자로 지명되었으며, 카이사르에게 자녀가 있다면 그의 후견인이 될 예정이었다.
1.2. 유년기 및 초기 관계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유년 시절을 주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그리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같은 동료들과 함께 보냈다. 이들 중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는 특히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강력한 신뢰를 받았으며, 카이사르는 그를 '젊은 브루투스'라고 부르며 아끼고 사랑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그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제2순위 상속자로 지명된 것은 이러한 카이사르의 신뢰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또한 카이사르는 자신의 자녀가 어릴 경우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그 후견인으로 지정할 정도로 그를 깊이 신임했다. 이처럼 카이사르와의 특별한 관계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초기 정치적 및 군사적 행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카이사르 휘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기반이 되었다.
2. 군사 및 정치 경력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핵심적인 부하이자 유능한 군사 지휘관으로서 갈리아 전쟁과 로마 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군사적 재능과 행정 경험은 카이사르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를 로마 공화정 말기의 주요 인물로 부상시켰다.
2.1. 갈리아 전쟁 복무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에 레가투스로서 참전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원정에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비롯한 로마 원로원 유력자들의 자제들도 다수 참여했다.
그는 기원전 56년의 모르비한 만 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해상전에 능한 베네티족과의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함대를 지휘했으며, 긴 장대에 낫 모양의 갈고리를 달아 적 선박의 돛을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하여 베네티족 함대를 무력화시키고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 승리로 베네티족은 이동 불능 상태가 되었고, 로마군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 패배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기원전 52년 베르킨게토릭스와의 전투에서도 중요한 지휘를 맡았고, 알레시아 공방전에도 참전하여 갈리아 전쟁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지휘력을 입증하며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았다.

2.2. 내전 및 해상 작전
로마 내전이 발발하자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주저 없이 그의 사령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으며, 다시 한번 함대 작전 지휘를 맡았다. 기원전 50년에는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트리아리우스의 여동생이자 키케로의 친구인 파울라 발레리아와 결혼했는데, 트리아리우스는 나중에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 편에서 싸우게 된다.
당시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는 폼페이우스 편에 가담했고, 히스파니아로 서둘러 진격하여 폼페이우스의 군단을 차단하려던 카이사르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마실리아 해상 봉쇄 임무를 맡겼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30일 이내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함대를 건조했으며, 마실리아 함대를 두 차례 격파했다. 그는 육상 봉쇄를 지휘했던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와 협력하여 마실리아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처럼 내전 기간 내내 그는 카이사르의 충실한 부하로서 전장에서 끝까지 싸웠고, 그의 뛰어난 활약은 카이사르 정권 내에서 그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2.3. 공직 및 행정
군사적 재능과 더불어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로마 공화정의 행정 시스템 내에서도 다양한 공직을 역임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는 기원전 50년에 재무관을 지냈으며, 기원전 47년부터 기원전 46년까지 트란살피나 갈리아의 부관으로 활동했다.
기원전 45년에는 법무관을 지냈고, 기원전 44년에는 카이사르의 개인적인 지명으로 외국인 관련 법무관인 프라에토르 페레그리누스에 임명되었다. 또한 카이사르는 그를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으로 임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기원전 42년의 집정관으로도 지명되어 있었다. 이러한 공직 경험을 통해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로마 공화정 행정의 여러 측면을 이해하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3. 카이사르 암살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최측근이자 신뢰받는 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공화정을 구원한다는 명분 아래 카이사르 암살 음모에 깊이 가담하는 충격적인 선택을 했다. 그의 가담은 암살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로마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큰 파장을 남겼다.

3.1. 암살 음모 가담
기원전 45년 문다 전투에서 보수파가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카이사르가 독재관으로 로마에 돌아왔을 때,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시우스와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설득 끝에 카이사르 암살 음모에 가담하게 되었다. 카이사르의 충실한 부하이자 그의 깊은 신뢰를 받던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암살에 관여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가 공화정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이상주의적 동기에서 행동했다고 보기도 한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이드의 날에 카이사르는 당초 아내의 염려 때문에 폼페이우스 대극장에 있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때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를 원로원 회의장으로 설득하고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카이사르에게 "용기 없는 자들만이 점술을 믿는다고 원로원 회의에 나갈 것을 맹세한 자가 가지 않으면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참석을 강력히 촉구했다. 또한 암살 계획을 카이사르에게 알리려 했을지 모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교묘하게 따돌리며 카이사르가 회의장에 도착하도록 도왔다. 그의 이러한 설득과 방해 공작은 암살 음모가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결정은 로마 정치에 예측 불가능한 거대한 파장을 불러왔다.
3.2. 암살 실행
원로원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카이사르가 첫 번째 암살자인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에게 공격받은 뒤,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포함한 공모자들은 숨겨둔 단도로 카이사르를 찔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총 23군데의 칼자국을 입었으며, 니콜라우스 다마스케누스에 따르면 데키무스는 카이사르의 허벅지를 찔렀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서는 그가 카이사르를 8번째로 찔렀다고 전해진다. 카이사르는 토가 자락으로 몸을 감싼 채 쓰러졌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로마 공화정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암살은 공화정을 복원하려는 시도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기나긴 로마 내전을 촉발하고 로마가 제정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가속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4. 암살 이후 활동 및 최후
카이사르 암살 이후,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고립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의 마지막 행적은 로마 공화정 말기의 격동과 혼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4.1. 갈리아 키살피나에서의 충돌
카이사르 암살 다음 날, 암살자들은 카이사르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제안으로 원로원으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과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은 암살자들에게 분노했고, 상황은 평화롭지 않았다.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몸을 낮추었으며, 데키무스는 프라에토르 페레그리누스 직위를 이용하여 로마를 떠나 있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옥타비아누스에 이은 제2순위 상속자로 지명된 사실이 공개되자, 큰 충격을 받아 얼굴이 흙빛이 되었고 암살에 가담한 것을 후회하며 집에 틀어박혔다고 한다.
화해의 분위기는 곧 사라졌고, 암살자들은 점차 압박을 느끼기 시작했다. 기원전 44년 3월부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데키무스에게 할당했던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그해 가을까지 카이사르에게 대행 재무관으로서 할당받은 자신의 속주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현지 부족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원로원은 그에게 속주를 안토니우스에게 넘기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거부했고, 이는 안토니우스의 즉각적인 대응을 불러일으켰다. 안토니우스에게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격파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탈리아 내 갈리아 지역을 장악하고 자신의 우위를 되찾는 방법이었다. 반대로 키케로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고 공화정을 회복하라고 독려했다.
기원전 43년,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무티나를 점령하고 장기적인 포위전에 대비해 보급품을 비축했다. 안토니우스는 그를 포위하여 굶주리게 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집정관이었던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와 가이우스 판사가 포위를 풀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필리피카이를 집필한 키케로의 지시에 따라 원로원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카이사르의 19세 상속자이자 이미 대행 집정관 지위에 오른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는 가이우스 판사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기원전 43년 4월 14일, 포룸 갈로룸 전투에서 첫 번째 충돌이 발생했다. 안토니우스는 상대 병력을 각개격파하려 했고, 가이우스 판사와 옥타비아누스의 병력을 격파하여 판사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이후 히르티우스의 기습 공격에 의해 패배했다. 4월 21일 무티나 전투에서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고, 안토니우스는 다시 패배했으며 히르티우스가 사망했다. 안토니우스는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베르킨게토릭스가 카이사르에게 당했던 것처럼 이중 포위망에 갇히기를 원치 않아 철수했다.

포위가 풀리자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조심스럽게 강 건너편에서 자신을 구출한 군단의 사령관이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차갑게 자신은 안토니우스를 공격하러 왔을 뿐 카이사르의 암살자를 돕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안토니우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의 많은 병사들이 옥타비아누스에게로 이탈하고 말았다. 갈리아에서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안토니우스와 합류하자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결국 패배했다.
4.2. 도주와 처형
키케로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플란쿠스와 합류하여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을 벌이기 위해 알프스산맥을 넘었다. 그러나 플란쿠스가 안토니우스 쪽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입지는 유지될 수 없게 되었고, 그는 결국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주둔하고 있던 마케도니아로 도주하려 했으나, 도주하던 중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충성하는 갈리아 부족의 지도자에게 체포되어 기원전 43년 9월 중순에 처형되었다. 그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14명의 공모자들 중 가장 먼저 처형된 인물이 되었다. 그의 죽음은 로마 내전기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그가 작성했던 여러 편의 편지들이 키케로의 서신집에 보존되어 전해진다.
5. 평가 및 영향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핵심 인물로서 로마사의 흐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종종 다른 인물과 혼동되거나 대중문화에서 왜곡되어 묘사되기도 했다.
5.1. 역사적 평가 및 혼동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그는 카이사르의 충성스러운 부하이자 능력 있는 장군이었으나, 독재적인 카이사르를 제거함으로써 공화정을 수호하려 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로마를 더 큰 혼란과 내전으로 몰아넣었으며, 이는 로마 공화정의 종말을 앞당기고 제정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 암살 공모자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이름이 비슷하여 자주 혼동되거나, 심지어 동일 인물로 합쳐져 묘사되기도 한다.
특히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로 유명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문구의 진정한 대상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의 영향으로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지칭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과 소설가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가 가장 신뢰하고 아들처럼 여겼던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암살에 가담한 사실이 카이사르에게 더욱 충격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이 말이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수에토니우스는 《황제열전》에서 카이사르가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보며 그리스어로 "καὶ σὺ τέκνον"("아들아, 너도?")이라고 마지막 말을 했다고 기록했으나,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는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에 대한 언급이 없다.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독재자》에서는 카이사르의 이 비난의 말이 마르쿠스가 아닌 데키무스를 향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5.2. 문화적 묘사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여러 문학 작품, 연극, 영화 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어 왔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는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실수로 "데키우스"로 잘못 표기되어 등장한다. 이러한 잘못된 표기는 조지프 애디슨의 연극 《카토, 비극》에서도 '데키우스'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키케로의 비극》이라는 연극에서는 그의 본명으로 등장한다.
- 앨런 매시의 1993년 소설 《카이사르》에서는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갈리아 추장에게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자신의 이야기와 카이사르 암살 가담 이유를 서술하는 화자로 등장한다.
- 콜린 매컬러의 소설 시리즈 《마스터스 오브 롬》의 《카이사르》와 《10월의 말》에서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며, 그와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가 암살 음모의 실제 지도자로 묘사된다.
- 콘 이글든의 소설 시리즈 《황제》에서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라는 역사적 인물들이 '마르쿠스 브루투스'라는 한 인물로 합쳐져 묘사된다.
- 벤 케인의 소설 《잊힌 군단》, 《은 독수리》, 《로마로 가는 길》에서는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파비올라의 연인으로서 줄거리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 S.J.A. 터니의 소설 시리즈 《마리우스 노새》에서는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뛰어난 해군 사령관이자 카이사르의 가장 충성스러운 장교 중 한 명으로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