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배경
데이비드 2세의 출생과 가족 관계, 어린 시절의 교육, 그리고 첫 번째 결혼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그의 초기 삶과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다.
1.1. 출생과 가족
데이비드 2세는 1324년 3월 5일 파이프의 던펌린 수도원에서 로버트 1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엘리자베스 드 버그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 중 한 명이었다. 태어난 직후 그는 파이프의 인치머독에 있는 세인트 앤드루스 주교의 영지에서 유모의 보살핌을 받았다. 1326년, 그의 아버지에 의해 캐릭 백작으로 책봉되었고, 턴베리 성에 왕자를 위한 공식 거처가 마련되었다. 데이비드가 세 살이던 1327년에 그의 어머니는 사망했다. 1329년 2월, 병약한 아버지가 턴베리를 방문하기도 했다.
1.2. 어린 시절과 교육
데이비드 2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로버트 1세가 데이비드의 교육을 위해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책을 구매해 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3. 조앤 오브 더 타워와의 결혼
노샘프턴 조약의 조건에 따라, 데이비드 2세는 1328년 7월 17일, 그가 4세이고 조앤이 7세였을 때 베릭 성에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사벨라의 딸인 조앤 오브 더 타워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34년간 지속되었으나 자녀는 없었다.
2. 통치
데이비드 2세의 통치 기간은 즉위와 대관식, 섭정 기간 동안의 초기 도전, 프랑스 망명, 잉글랜드에서의 포로 생활, 그리고 스코틀랜드 복귀 후의 후기 통치로 나뉜다. 이 시기들은 그의 왕위 유지와 스코틀랜드의 독립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2.1. 즉위와 대관식
데이비드 2세는 1329년 6월 7일 아버지 로버트 1세의 사망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어린 나이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평화의 불확실성 때문에, 그는 2년 반 동안 턴베리에서 스콘으로 이동하지 못했다. 7세의 데이비드 왕과 그의 왕비는 1331년 11월 24일 스콘 수도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데이비드는 스코틀랜드 군주 중 최초로 대관식에서 도유를 받은 인물이 되었다.
2.2. 섭정과 초기 도전 과제
데이비드 2세의 즉위와 함께 로버트 1세의 지시에 따라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가 섭정으로 임명되어 데이비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다. 로버트 1세의 왕실 정부는 1329년부터 1332년까지 대체로 유지되었다. 랜돌프 백작이 1332년 7월 20일 사망하자, 1332년 8월 2일 퍼스에서 스코틀랜드 귀족 회의에 의해 마 백작 도널드가 새로운 섭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도널드 백작은 불과 10일 후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로버트 1세의 누이 크리스티나 브루스의 남편인 앤드루 머레이 경이 새로운 섭정으로 선출되었으나, 1333년 4월 록스버러에서 잉글랜드군에 포로로 잡혔다. 이에 따라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섭정직을 계승했지만, 그 역시 같은 해 7월 핼리던 힐 전투에서 전사했다.
한편, 1332년 9월 24일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가 패배한 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비호를 받던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권 주장자 에드워드 베일리올은 잉글랜드와 그의 스코틀랜드 추종자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2월 애넌 전투 이후 베일리올은 잉글랜드로 도피해야 했지만, 이듬해 잉글랜드 왕이 이끄는 침공군의 일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2.3. 프랑스 망명

1333년 7월 핼리던 힐 전투에서 잉글랜드가 승리하자, 데이비드 2세와 그의 왕비는 안전을 위해 프랑스로 보내졌고, 1334년 5월 14일 불로뉴에 도착했다. 그들은 프랑스의 필리프 6세로부터 매우 정중한 환대를 받았다. 스코틀랜드 왕의 프랑스 망명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샤토 가이야르가 그의 거처로 제공되었고, 1339년 10월 비롱포스에서 잉글랜드군과 프랑스군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치했던 회담에 그가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1341년경, 데이비드의 대표자들은 스코틀랜드에서 다시 우위를 점했다. 데이비드는 1341년 6월 2일 킨카딘셔의 인버버비에 상륙하여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17세의 나이로 직접 정부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2.4. 잉글랜드에서의 포로 생활

1346년, 오래된 동맹의 조항에 따라 데이비드 2세는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게 크게 패배한 프랑스를 돕기 위해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에서 유인하고자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헥섬에서 초기 성공을 거두었으나, 데이비드의 군대는 1346년 10월 17일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데이비드는 얼굴에 화살 두 발을 맞고 존 드 코플랜드 경에게 포로로 잡혔다. 왕은 워크 온 트위드로, 이어서 밤버러 성으로 이송되었고, 요크에서 이발사-외과의들이 그의 심각한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불려왔다. 데이비드 2세는 런던으로 이송되어 1347년 1월 런던탑에 수감되었다.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데이비드는 버크셔의 윈저 성으로 옮겨졌다. 희곡 에드워드 3세에서 데이비드가 에드워드 3세에게 봉신으로서 소개되는 장면은 허구이다. 데이비드와 그의 가신들은 나중에 햄프셔의 오디햄 성으로 옮겨졌다. 그의 투옥 생활은 대부분의 왕실 포로들과 달리 엄격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1355년부터 그가 신하들과의 접촉을 금지당했다는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11년 동안 잉글랜드에 포로로 남아 있었다.
1357년 10월 3일, 스코틀랜드 섭정 위원회와의 여러 차례에 걸친 협상 끝에 베릭 어폰 트위드에서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왕의 몸값으로 매년 1만 마르크씩 총 10만 마르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은 1357년 11월 6일 스콘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비준되었다.
2.5. 스코틀랜드 복귀와 후기 통치

데이비드 2세는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과 성직자들을 대동하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또한 그의 정부(情婦)였던 캐서린 모티머를 데려왔는데, 그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캐서린은 1360년 앵거스 백작과 다른 귀족들이 고용한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앵거스 백작은 1362년에 사망했으므로, 살해 2년 후의 사망은 흑사병이나 다른 원인일 가능성이 더 높다. 캐서린의 자리는 마거릿 드럼몬드가 정부로서 대신했다.
6년 후, 왕국의 빈곤으로 인해 1363년의 몸값 할부금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에 데이비드는 런던으로 가서 몸값 취소를 대가로 스코틀랜드를 에드워드 3세나 그의 아들 중 한 명에게 물려주겠다고 제안하여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데이비드는 스코틀랜드인들이 그러한 합의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1364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을 다음 왕으로 삼으려는 제안을 분개하며 거부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데이비드는 에드워드 3세와 비밀 협상을 계속했고, 이는 표면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왕비 조앤은 1362년 9월 7일(41세) 하트퍼드셔의 하트퍼드 성에서 사망했는데, 아마도 흑사병의 희생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364년 2월 20일경 존 로기 경의 미망인이자 맬컴 드럼몬드 경의 딸인 마거릿 드럼몬드와 재혼했다. 그는 1370년 3월 20일경 그녀와 이혼했다. 그들은 자녀가 없었다. 그러나 마거릿은 아비뇽으로 가서 스코틀랜드에서 선고된 이혼 판결을 뒤집기 위해 교황 우르바노 5세에게 성공적으로 항소했다. 그녀는 데이비드가 사망한 지 4년 후인 1375년 1월에도 살아 있었다.
1364년부터 데이비드는 적극적으로 통치하며, 미래의 후계자이자 당시 반항적인 귀족이었던 로버트 2세가 이끄는 대규모 귀족 반란을 단호하게 진압했다. 데이비드는 잉글랜드와의 최종 평화를 추구하는 목표를 계속 이어갔다. 그가 사망할 당시, 스코틀랜드 군주제는 더욱 강력해졌고, 신뢰할 수 있는 자료에 따르면 나라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왕국"이었다. 왕실 재정은 예상보다 훨씬 더 번성했다.
3. 사생활
데이비드 2세의 사생활은 그의 결혼 관계와 후계자 부재라는 중요한 특징을 가진다. 이는 그의 통치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왕국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3.1. 결혼과 관계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는 두 번 결혼했으며 여러 정부를 두었지만, 어떤 관계에서도 자녀를 두지 못했다.
- 조앤 오브 더 타워: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사벨라의 딸인 조앤은 데이비드의 첫 번째 왕비였다. 데이비드와 조앤은 1328년 7월 17일, 그가 4세이고 그녀가 7세였을 때 결혼했다. 이 결혼은 노샘프턴 조약의 조건에 따른 것이었다. 그들은 34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조앤 왕비는 1362년 9월 7일(41세) 하트퍼드셔의 하트퍼드 성에서 사망했다.
- 마거릿 드럼몬드: 존 로기 경의 미망인이자 맬컴 드럼몬드 경의 딸인 마거릿 드럼몬드는 조앤 왕비가 사망하기 전인 1361년경부터 데이비드의 정부였다. 데이비드와 마거릿은 1364년 2월 20일에 결혼했다. 여전히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하자, 데이비드는 1370년 3월 20일 그녀가 불임이라는 이유로 이혼을 시도했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5세가 이혼 판결을 뒤집었다. 데이비드가 1371년 2월 22일 사망했을 때, 로마의 관점에 따르면 마거릿과 데이비드는 여전히 법적으로 부부 관계였다. 마거릿은 1375년 1월 31일 이후에 사망했으며, 그녀의 장례 비용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지불했다.
- 아그네스 던바: 아그네스 던바는 데이비드 2세가 사망할 당시 그의 정부였다. 그는 그녀와 결혼할 계획이었으나, 마거릿과의 이혼 판결이 뒤집히면서 결혼이 지연되었다.
3.2. 후계자 부재
데이비드 2세는 어떤 관계에서도 자녀를 두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는 브루스가의 마지막 남성 계승자가 되었고, 그의 사망 후 왕위는 그의 조카인 마조리 브루스의 아들 로버트 스튜어트에게 계승되어 스튜어트가가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왕조를 열게 되었다.
4. 죽음과 계승
데이비드 2세의 죽음과 그 이후의 왕위 계승 과정은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4.1. 죽음
데이비드 2세는 1371년 2월 22일 에든버러 성에서 46세의 나이로 예기치 않게 자연사했다. 데이비드는 이전에 계획했던 대로 부모님과 함께 던펌린 수도원에 묻히지 않고, 홀리루드 수도원의 높은 제단 앞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선택은 홀리루드가 에든버러 성에서 불과 1609 m (1 mile) 떨어진 가장 가까운 교회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의 후계자가 이전 통치 시대에 빠르게 마침표를 찍고 싶어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장례식은 토머스 수도원장이 주관했다.
4.2. 계승
데이비드 2세는 자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브루스가의 마지막 남성 후손이 되었고, 그의 왕위는 그의 이복 누이인 마조리 브루스의 아들인 조카 로버트 2세에게 계승되었다.
5. 평가와 유산
데이비드 2세의 통치 기간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지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그의 개인적인 결정과 관련된 비판과 논란도 존재했다.
5.1. 통치 기간에 대한 평가
데이비드 2세는 망명과 포로 생활로 오랜 기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왕국의 생존을 보장하고 정부 기구를 개혁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군주제를 강력한 위치에 올려놓았으며, 왕실 재정은 예상보다 훨씬 더 번성했다. 그가 사망할 당시 스코틀랜드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왕국"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반항적인 귀족들을 단호하게 다루고, 미래의 후계자였던 로버트 2세가 이끄는 귀족 반란까지 진압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5.2. 비판과 논란
데이비드 2세는 몸값 지불을 위해 거둔 세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함으로써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 또한, 몸값 취소를 대가로 잉글랜드 왕이나 그의 아들에게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권을 물려주겠다고 제안한 것은 스코틀랜드 의회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그의 통치에 대한 주요 비판점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는 조카 로버트 스튜어트를 경멸하여 그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이를 위해 마거릿 드럼몬드와 재혼하여 대안적인 후계자를 낳으려 했으나 실패하자 이혼을 시도하는 등 논란이 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6. 허구적 묘사

데이비드 2세는 여러 역사 소설과 대중문화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 소설:
- 존 조지 에드거(1834~1864)의 크레시와 푸아티에르; 또는 흑태자의 시종 이야기 (1865): 1344년부터 1370년까지의 사건과 1376년의 에필로그를 다룬다. 백년 전쟁과 "스코틀랜드 국경 전쟁"(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일부 사건을 묘사하며, 네빌스 크로스 전투가 이야기의 핵심 부분이다. 데이비드 2세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 에노의 필리파,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 나이젤 트랜터의 기사도 정신의 꽃 (1988): 1332년부터 1339년까지의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사건을 다룬다. 데이비드 2세는 조연이며, 주인공은 달하우지의 알렉산더 램지와 리데스데일의 윌리엄 더글러스이다.
- 버나드 콘웰의 방랑자 (2002).
- 연극:
-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 에드워드 3세에 등장한다.
- 게임:
- 2012년 대전략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1336년 스코틀랜드의 군주로 등장한다.
7. 관련 항목
- 영국의 군주 목록
- 스코트인의 왕
- 스코틀랜드 군주의 가계도
- 로버트 1세 (스코틀랜드)
- 엘리자베스 드 버그
- 브루스 씨족
- 버그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