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더치 레너드는 1892년 4월 16일, 오하이오주 이리 카운티의 버밍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야구를 매우 좋아했으며, 1910년부터 1911년까지 당시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위치했던 세인트 메리 칼리지에서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 대학 졸업 후인 1912년, 그는 웨스턴 리그 소속의 덴버 그리즐리스에서 뛰며 22승 9패, 326 삼진, 2.5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2. 프로 야구 경력
레너드는 1913년 메이저 리그에 데뷔한 이후, 탁월한 투구 능력과 인상적인 기록들을 남기며 메이저 리그 야구사에 이름을 새겼다. 그의 경력은 특히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의 경이로운 평균자책점 기록과 월드 시리즈 우승 기여, 그리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시절 타이 코브와의 첨예한 갈등으로 특징지어진다.
2.1. 데뷔 및 초기 경력
레너드는 1911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 계약했으나, 당시 애슬레틱스에는 유망한 젊은 투수들이 많아 곧 방출되었다. 이후 1912년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하여 1913년 4월 12일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첫 시즌에는 14승 17패, 2.3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안정적인 출발을 보였다. 그는 직구, 커브, 그리고 당시에는 허용되었던 스핏볼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며 타자들을 제압했다.
2.2.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레너드는 메이저 리그 2년차였던 1914년,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시즌 초 5월에야 첫 승리를 거두며 다소 늦게 시작했지만, 이후 7경기 연속 완봉승을 기록하는 등 경이로운 투구를 이어갔다. 그는 시즌 내내 4점 이상을 허용하지 않으며 시즌 막판까지 0점대 평균자책점을 유지했다. 9월에는 손목 부상으로 예정보다 일찍 시즌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19승 5패, 224.2 이닝 투구, 그리고 0.96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 0.96의 평균자책점은 아메리칸 리그 및 현대 메이저 리그 역사상 단일 시즌 최저 기록으로, 20세기 이후 메이저 리그에서 유일하게 0점대를 기록한 수치이다. (역대 최저 기록은 1880년 50피트 투수 거리에서 105 이닝을 던져 0.8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팀 키프가 보유하고 있다.) 당시에는 평균자책점 개념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이 기록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915년, 레너드의 연봉은 5000 USD까지 올랐으나, 아직 손목 상태가 좋지 않아 6주 동안 단 3차례밖에 등판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부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레너드는 '태만한 선수'로 비난받았고, 구단으로부터 출장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8월에 출장 정지 처분이 해제되자마자 맹렬히 등판했으나, 후반기에는 지속적인 피로로 인해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즌을 15승 7패, 2.36의 평균자책점으로 마쳤다. 같은 해 1915년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를 상대로 2대1 승리를 거두며 팀의 4승 1패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16년에는 브루클린 로빈스를 상대로 1916년 월드 시리즈 4차전 승리를 거두며 팀의 2년 연속 우승에 공헌했다. 또한, 1916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상대로 첫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1918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이 해 1918년 월드 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를 꺾고 다시 한 번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그러나 재정적 부담이 커진 레드삭스는 1918년 시즌 오프에 선수들을 대량으로 방출하는 '퍼내기'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레너드도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되었으나, 연봉 문제로 구단과 합의점을 찾지 못해 훈련에 불참했다. 이에 양키스 구단주가 격노하여 레너드를 다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트레이드했다.
2.3.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시절
1919년 1월, 레너드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이적하여 1919년부터 1921년, 그리고 1924년부터 1925년까지 활동했다. 이적 첫해에는 무난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1920년 '라이브볼 시대'가 시작되면서 그의 주무기였던 스핏볼이 금지되자 성적이 크게 하락했다. 1921년 오프시즌, 타이거스는 레너드의 연봉을 대폭 삭감하려 했고, 레너드는 이에 반발하여 구단의 허락 없이 독립 리그인 산 호아킨 밸리 리그의 프레즈노 팀에서 뛰었다 (1922년과 1923년). 이로 인해 그는 메이저 리그로부터 3년간의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1924년 메이저 리그에 복귀했지만, 구단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고 특히 당시 타이거스의 선수 겸 감독이었던 타이 코브와 심각한 불화를 겪었다. 이들의 갈등은 레너드가 1925년 7월 19일 마지막 메이저 리그 경기를 치르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레너드는 통산 139승 114패, 2.76의 평균자책점, 1160 탈삼진을 기록했다.
3. 주요 업적 및 기록
더치 레너드의 야구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은 1914년 시즌에 달성한 0.96의 평균자책점이다. 이는 메이저 리그의 현대 야구 시대(1900년 이후)에서 기록된 단일 시즌 최저 평균자책점이며, 20세기 이후로는 유일한 0점대 평균자책점 기록이다. 이 기록은 1968년 밥 깁슨이 기록한 1.12보다도 낮아 그의 투구 지배력을 보여준다.
그는 또한 선수 생활 중 두 차례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첫 번째는 1916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상대로, 두 번째는 1918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기록했다. 이 두 차례의 노히트 노런은 그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에이스 투수로서 팀의 성공에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레너드는 1915년, 1916년, 1918년 월드 시리즈 우승팀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팀의 '세계 최고' 타이틀 획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타이 코브와의 갈등 및 승부 조작 의혹 제기
레너드와 타이 코브의 갈등은 코브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선수 겸 감독이 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1914년, 레너드가 코브에게 직구를 던져 갈비뼈를 맞힌 사건이 있었다. 다음 타석에서 코브는 번트를 대 레너드의 발이 베이스에 닿는 순간 자신의 스파이크가 박힌 발로 레너드의 발을 밟아 피를 흘리게 했다.
코브가 1921년 타이거스의 감독이 되면서 이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코브는 야간 통행 금지 위반을 이유로 레너드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등 그를 괴롭혔다. 1921년 시즌 중, 레너드가 11승 13패(평균자책점은 양호했음에도)를 기록하자, 코브는 레너드가 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어둔 채 "그 빌어먹을 더치맨을 웨이버에 올릴 것"이라고 거짓 전화 통화를 하는 등 심리전을 펼쳤다. 1922년에는 조지 시슬러와 트리스 스피커를 상대로 어떻게 투구할지에 대해 싸웠고, 레너드는 코브 면전에서 욕설을 퍼부으며 그를 "말대가리"라고 부르고 1921년 시즌에 팀을 떠났다.
레너드가 산 호아킨 밸리 리그에서 두 시즌을 보낸 후 1924년 타이거스에 복귀하자, 코브와의 불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1925년 시즌 중반까지 레너드는 11승 3패를 기록하고 있었음에도, 코브는 레너드를 게으름뱅이라고 비난하며 팀원들 앞에서 "나에게 볼셰비키 행세는 꿈도 꾸지 마라. 여기서 보스는 나다"라고 질책했다. 레너드는 코브가 자신을 혹사시킨다고 비난했고, 코브는 1925년 7월 14일 레너드가 20안타를 맞고 12대 4로 패하는 동안 그를 마운드에 계속 두는 식으로 응수했다. 이 경기 이후 레너드는 코브를 위해 투구하기를 거부했고, 타이거스는 레너드를 웨이버에 공시했다. 다른 팀이 그를 영입하지 않으면서 레너드의 야구 경력은 막을 내렸다.
은퇴 후, 레너드는 코브에게 복수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는 코브에 대해 "그 빌어먹을 코브를 폭로해서 망쳐버릴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1926년, 레너드는 아메리칸 리그 총재 밴 존슨에게 연락하여 코브와 트리스 스피커가 승부 조작 또는 도박에 연루되었다고 고발했다. 레너드는 1919년 타이거스와 인디언스 경기 전, 코브와 스피커가 타이거스가 승리하도록 공모하여 팀이 3위를 차지하고 월드 시리즈 상금을 받을 수 있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당시 코브와 스모키 조 우드가 작성한 편지들을 제시했는데, 이 편지들은 도박이나 승부 조작을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존슨 총재가 1926년 12월 레너드의 편지를 공개하면서 큰 스캔들이 시작되었다.
코브는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 커미셔너가 주재하는 청문회에 소환되어 레너드의 주장을 부인했다. 코브는 레너드가 "과거 팀 내에서 볼셰비키라는 평판이 있었다"고 언급하며 그의 증언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려 했다. 레너드는 청문회에 출석하여 증언하기를 거부했는데, 이는 "그 난폭한 남자(코브)"로부터 신체적 공격을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레너드의 증언이 없는 상황에서 랜디스 커미셔너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코브와 스피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920년의 블랙삭스 스캔들로 인해 메이저 리그 인기가 침체되었던 상황에서, 슈퍼스타인 코브에게 추가적인 징계를 내리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코브는 이후 감독직에서 스스로 물러났고, 레너드는 그와 대면하기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 은퇴 후 삶
레너드는 야구 선수 생활 은퇴 후에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캘리포니아주에서 매우 성공적인 과수원 사업가이자 와인 제조가로 변모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또한 그는 수준급의 왼손 골프 실력을 가진 선수이기도 했다. 레너드는 1952년 7월 11일, 뇌졸중 합병증으로 인해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캘리포니아주 프레즈노에 위치한 마운틴 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사망할 당시 재산 규모는 약 210.00 만 USD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6. 사회적 기여 및 유산
더치 레너드의 삶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회적 기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계 미국인들을 도운 사례이다. 1942년, 미국 행정명령 9066호에 따라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로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면서 대부분의 농장주들은 자신의 집과 사업체를 영원히 잃게 되었다. 그러나 더치 레너드는 강제 수용된 일본계 미국인 농장주의 농장을 대신 관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전쟁이 끝난 후 농장주가 자신의 땅으로 돌아왔을 때, 레너드는 지난 몇 년간 농사를 지어 벌어들인 이익금 2.00 만 USD를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의 사업체, 농장, 토지, 주택 등이 약탈되거나 도난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시기에, 레너드가 자신의 약속을 지키며 보여준 이러한 행동은 매우 드문 일이었고, 그는 "미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이러한 그의 인도주의적 행동은 단순히 개인적인 선행을 넘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인류애를 보여주는 긍정적인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7. 관련 항목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연간 평균자책점 리더 목록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노히트 노런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