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다이라노 도키코(平時子たいらの ときこ일본어, 1126년 ~ 1185년)는 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의 귀족이자, 권세가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계실(둘째 부인)이다. 그녀는 다이라노 도쿠코(겐레이몬인)의 어머니이자, 비극적인 운명을 맞은 안토쿠 천황의 외할머니로, 후대에 그녀가 불문에 귀의한 뒤에는 주로 二位尼니노아마일본어(종2위의 비구니)로 불리며 널리 알려졌다. 도키코의 생애는 다이라 가문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하며, 가문의 전성기에는 황실과의 관계를 굳건히 하는 데 기여했으나, 겐페이 전쟁을 거치며 가문이 몰락하는 과정에서는 그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그녀는 단노우라 전투에서 다이라 가문이 최종 패배했을 때, 어린 안토쿠 천황을 품에 안고 바다에 투신하여 자결함으로써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이러한 그녀의 희생적인 죽음은 단순한 패배자의 모습이 아닌, 멸망하는 가문과 제왕의 존엄을 지키려 한 비극적인 영웅의 모습으로 『헤이케 이야기』를 비롯한 후대 문학과 예술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삶은 권력 투쟁의 격랑 속에서 한 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고통과 좌절, 그리고 명예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 어떠한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 생애
다이라노 도키코는 다이라 가문의 핵심 인물로서, 출생부터 다이라 가문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배경과 더불어 일본 조정의 주요 정치적 사건들에 깊이 관여하며 가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
2.1. 출생 및 배경
다이라노 도키코는 1126년에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하급 공가(公家)인 다이라노 도키노부였으며, 어머니는 시라카와 천황의 딸인 레이시 내친왕(니조 오미야)을 모시던 하급 여관(하사모노)이었다. 그녀에게는 동복 남동생인 다이라노 도키타다(권대납언)와 이복 혹은 동복 여동생인 다이라노 시게코(겐슌몬인), 그리고 이부 오빠인 승려 노엔이 있었다.
도키코는 첫아들 다이라노 무네모리의 출생 연도(1147년)를 통해 추정하건대, 1145년경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후처로 맞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기요모리와의 사이에서 무네모리 외에도 다이라노 도모모리, 다이라노 도쿠코(겐레이몬인), 다이라노 시게히라 등의 자녀를 두었다.
2.2. 조정에서의 활동 및 정치적 영향
헤이지의 난 이후, 다이라노 도키코는 니조 천황의 아들인 황태자(훗날의 로쿠조 천황)의 유모가 되었다. 1160년 12월 24일, 그녀는 야소노 쓰보네(八十島典侍)에게 내려진 포상의 추천으로 종삼위(従三位)에 서임되었다. 도키코가 니조 천황의 유모가 되고 기요모리가 유부(乳父)가 된 것은, 당시 고시라카와 천황과 니조 천황 간의 대립 속에서 니조 천황에 대한 복종과 정치적 봉사의 자세를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는 또한 신제이의 지위를 계승하려는 의도도 담고 있었다.
니조 천황이 사망한 후, 도키코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총애를 받던 이복 여동생 시게코와 함께 기요모리와 고시라카와 천황 사이의 정치적 제휴를 강화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1166년 10월 10일, 시게코가 낳은 노리히토 친왕(훗날의 다카쿠라 천황)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같은 해 10월 21일 도키코는 종이위(従二位)에 서임되었다.
1168년(닌안 3년), 도키코는 기요모리와 함께 출가했다. 기요모리가 후쿠하라로 거처를 옮긴 뒤, 그녀는 니시하치조 저택을 물려받아 하치조 구시게테이(八条櫛笥亭) 또는 하치조 니혼테이(八条二品亭)로 개명했다. 1171년(쇼안 원년), 딸 도쿠코가 다카쿠라 천황의 중궁으로 입궐하자, 도키코는 중궁의 출산과 다카쿠라 천황의 여러 황자녀의 출생 및 성장 의식에 깊이 관여하며 다이라 가문과 황실 간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180년(지쇼 4년), 기요모리에 의한 지쇼 3년의 정변 이후, 도쿠코가 낳은 외손자 안토쿠 천황이 즉위하자 도키코는 기요모리와 함께 준삼궁(准三宮)의 선지(宣旨)를 받았다. 기요모리는 말년에 무네모리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의지를 강하게 보였고, 이로 인해 죽은 다이라노 시게모리의 자손들인 고마쓰 가문은 적통에서 제외되고 도키코의 혈통이 새로운 적통이 되었다.
2.3. 다이라 가문의 정신적 지주
1181년 기요모리 사망 후, 도키코는 아들 무네모리와 안토쿠 천황의 생모인 딸 도쿠코(겐레이몬인)와 함께 다이라 가문의 구심점이자 실질적인 가문 최고 어른이 되었다. 그녀는 몰락해가는 다이라 가문의 정신적 지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격변하는 겐페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가문의 결속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3. 최후
1185년, 겐페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단노우라 전투에서 다이라 가문은 미나모토군에게 최종적으로 대패했다. 도키코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린 외손자 안토쿠 천황을 품에 안고 "물결 아래에도 도읍이 있사옵니다(浪の下にも都の候ぞ)"라고 속삭인 뒤, 함께 바다에 투신하여 자결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60세였다.
『愚管抄』구칸쇼일본어에 따르면, 도키코는 삼종신기(三種の神器) 중 하나인 아메노무라쿠모노쓰루기(天叢雲剣)를 지니고 있었고, 안토쿠 천황은 야사카니노마가타마(八尺瓊勾玉, 신새)를 지닌 채 물에 잠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천황은 이후에 구조되었다고도 한다. 한편 『吾妻鏡』아즈마카가미일본어의 기록에서는 도키코가 안토쿠 천황을 안고 아메노무라쿠모노쓰루기와 야사카니노마가타마를 모두 지닌 채 투신했다고 전한다. 베트남어 원문에서는 도키코가 쿠사나기노쓰루기(아메노무라쿠모노쓰루기의 별칭)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언급한다.
4. 묘소 및 전승
다이라노 도키코의 묘소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 위치한 아카마 신궁에 있으며, 그녀를 기리는 다양한 지역적 전승이 일본 각지에 남아있다.
4.1. 주요 묘소 및 추모 행사
다이라노 도키코의 주요 묘소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 있는 아카마 신궁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5월 2일, 전국헤이케회(全國平家會) 소속의 헤이케 오치우도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녀를 비롯한 다이라 일문을 추모하는 제례가 거행된다.


그녀를 기리는 다른 묘소나 비석들은 일본 여러 지역에 존재한다.
- 히로시마현 하쓰카이치시 미야지마초의 니노도노도로(二位殿燈籠)

- 돗토리현 야즈군 야즈초 히메지 지역의 안토쿠 천황 센코 기념비(安徳天皇遷幸記念碑, 안토쿠 천황 니노아마 천행 전승지)

- 돗토리현 도하쿠군 미사사정의 니노아마 묘소 설명판(二位の尼墓所説明판, 안토쿠릉 및 헤이케 일문 묘석 부근)
- 돗토리현 도하쿠군 미사사정 나카쓰 지역의 니노아마 묘석(二位の尼墓石)
-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 오가와초의 옛 시마바라 가도 니노아마 비(안내 기둥)
-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 오가와초의 니노아마 석비(二位の尼の石碑)
- 고치현 다카오카군 오치정 오치테이 784번지의 니와카히메노온하카(二位若姫之御墓)
4.2. 지역적 전승
야마구치현 나가토시 히오키 지역에는 그녀의 시신이 떠밀려왔다는 전승에 따라 "니노하마(二位ノ浜)"라고 불리는 해변이 있다. 이곳은 현재 해수욕장으로도 인기가 많다.
5. 관위
다이라노 도키코는 생전에 종이위(従二位, 주니어 세컨드 랭크)의 관위를 받았다. 출가 후에도 이 관위 때문에 '니노아마'(二位尼, 종2위의 비구니)로 불리게 되었다.
6. 평가 및 유산
다이라노 도키코는 다이라 가문의 핵심 인물이자 정신적 지주로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남편 다이라노 기요모리 사망 이후, 몰락해가는 가문을 이끌면서 아들 다이라노 무네모리와 딸 다이라노 도쿠코(겐레이몬인)와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녀의 마지막 순간, 어린 안토쿠 천황을 안고 바다에 투신한 비극적인 자결은 단순한 패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황실의 존엄과 다이라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 한 숭고하고 비극적인 선택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그녀의 이미지는 일본의 고전 문학인 『헤이케 이야기』를 통해 가장 잘 형성되었으며, 후대에 다이라 가문의 비극적인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영웅적인 여성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수많은 문학,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게임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일본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7. 같이 보기
- 다이라노 기요모리
- 다이라노 도쿠코
- 안토쿠 천황
- 단노우라 전투
- 헤이케 이야기
- 겐페이 전쟁
- 다이라 씨
- 아카마 신궁
- 니노아마 (소행성) (4959) - 다이라노 도키코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소행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