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누리 킬리길(Nuri Killigil튀르키예어) (1889년 ~ 1949년) 또는 누리 파샤(Nuri Pasha튀르키예어)는 오스만 제국의 군인이자 터키의 사업가이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전쟁 장관이었던 엔베르 파샤의 이복형제이다.
킬리길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북아프리카와 캅카스 전선에서 중요한 군사 작전을 지휘했으며, 특히 리비아에서 테슈킬라트-으 마흐수사(Teşkilat-ı Mahsusa튀르키예어) 활동을 조직하고, 캅카스 이슬람군 사령관으로서 바쿠를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바쿠 점령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민간인 학살에 연루되어 인도주의적 비판을 받았다.
전쟁 이후 그는 사업가로 변모하여 석탄 광산을 인수하고 무기 생산에 종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과 접촉하여 범튀르크주의를 추구하고 투르키스탄 군단 설립에 관여하는 등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보를 보였다. 1949년, 자신이 운영하던 이스탄불의 공장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과 관련된 논란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생애는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터키 공화국의 형성, 그리고 양차 세계 대전이라는 격동의 시기에 걸쳐 있으며, 그의 행적은 사회 및 역사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생애 및 배경
누리 킬리길은 1889년에 태어나 1949년에 사망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전쟁 장관이자 주요 정치인이었던 엔베르 파샤의 이복형제이다. 킬리길은 이스탄불에서 태어나고 사망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누리 킬리길의 어린 시절 환경이나 구체적인 학력 및 교육 경험에 대한 정보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3. 군 경력
누리 킬리길은 오스만 제국의 군인으로서 다양한 전선에서 활약했다. 그의 최종 계급은 명예 중장 계급인 파흐리 페리크(Fahrî Ferik튀르키예어)였다.
3.1.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중 누리 킬리길은 리비아와 캅카스 전선에서 중요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3.1.1. 리비아 작전
보병 기관총 대위 누리 에펜디는 1915년 2월 21일 자파르 알-아스카리 베이 소령과 1만 개의 금화와 함께 그리스 선박을 타고 오스만 리비아로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토브루크와 살룸 사이의 해안에 상륙한 후, 이탈리아 및 영국군에 맞서 테슈킬라트-으 마흐수사(Teşkilat-ı Mahsusa튀르키예어) 병력과 현지 병력의 작전을 조직하고 조율하는 것이었다. 그는 살룸에서 아흐메드 샤리프 에스 세누시를 만났다. 1917년, 영국군에 의해 분산된 노력을 조직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참모본부는 "아프리카 그룹 사령부"(Afrika Grupları Komutanlığı튀르키예어)를 설립했으며, 주된 목표는 리비아의 해안 지역이었다. 중령 누리 베이는 이 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그의 참모장은 압두라흐만 나피즈 베이(귀르만) 참모 소령이었다.
3.1.2. 캅카스 전선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하자, 오스만 제국군 사령관이자 누리 베이의 이복형인 엔베르 파샤는 캅카스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누리 베이를 리비아에서 불러들였다. 누리 베이는 명예 중장 계급인 파흐리 페리크(Fahrî Ferik튀르키예어)로 진급했으며, 자원병으로 구성된 캅카스 이슬람군을 창설하고 지휘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누리 베이는 1918년 5월 25일 엘리자베트폴(현 아제르바이잔 간자)에 도착하여 병력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슬람군은 1918년 7월 10일에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캅카스 해방 작전이 시작되었고, 볼셰비키 바쿠 코뮌과 아르메니아인 다슈나크추튠 세력, 그리고 캅카스 이슬람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누리 파샤가 이끄는 캅카스 이슬람군은 1918년 9월 15일 아제르바이잔 전체와 수도 바쿠를 점령했다. 그러나 10월 30일 무드로스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아제르바이잔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3.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누리 킬리길은 영국군에 의해 체포되어 바툼에 구금되었으며, 전범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919년 8월, 그의 지지자들이 그를 호송하던 경비병들을 기습하여 그가 에르주룸으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1920년 7월에는 엘리자베트폴에서 반소련 봉기를 지휘하기도 했다.
4. 후반기 생애와 사업 활동
군 경력 이후 누리 킬리길은 사업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38년, 그는 터키에 있는 석탄 광산을 매입했다. 이후 그는 총, 탄약, 방독면 및 기타 전쟁 장비의 생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는 무기 생산 중단을 발표했지만, 비밀리에 생산을 계속했다.
5. 제2차 세계 대전 및 범튀르크주의
누리 킬리길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범튀르크주의 대의에 대한 독일의 지원을 얻기 위해 1941년 앙카라 주재 나치 독일 대사 프란츠 폰 파펜과 접촉했다. 그의 도움으로 슈츠슈타펠에 의해 투르키스탄 군단이 창설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킬리길은 독일에 머물면서 나치 독일과 터키 간의 강력한 관계를 발전시키고 아제르바이잔의 독립을 인정받으려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41년 9월, 킬리길은 캅카스에서 반소련 범튀르크주의 봉기를 조직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독일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6. 사망
누리 킬리길은 1949년 3월 2일 이스탄불에 있는 자신의 공장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이 사고로 28명의 다른 사람들도 목숨을 잃었다. 당시 그의 시신은 훼손되어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적절한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고 매장되었다. 67년이 지난 2016년에 이르러서야 아제르바이잔 정치인 가니라 파샤예바와 이스탄불 시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적인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7. 평가 및 논란
누리 킬리길의 생애는 그의 군사적 업적과 함께 여러 논란을 안고 있다. 특히 그의 군사 작전 중 발생한 민간인 학살과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과의 연루는 역사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받는다.
7.1. 바쿠 학살

1918년 9월 15일, 누리 파샤가 이끄는 캅카스 이슬람군이 바쿠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약 3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이 사건은 바쿠 학살로 알려져 있으며, 누리 킬리길은 이 학살을 주도한 책임자로 지목되어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심각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그의 군사적 업적과는 별개로 그의 도덕적, 역사적 평가에 큰 오점을 남겼다.
7.2. 역사적 평가
누리 킬리길은 오스만 제국의 군인으로서 리비아와 캅카스 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논란이 되는 지점들이 존재한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과 접촉하고 투르키스탄 군단 설립에 관여하는 등 범튀르크주의를 추구하며 추축국 세력과 연루된 행보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활동은 그의 민족주의적 열망이 극단적인 이념과 결합될 수 있었음을 보여주며, 그의 역사적 유산에 복잡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