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국정 충지의 삶은 그의 출생부터 비극적인 죽음, 그리고 사후 처리까지 드라마틱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1.1. 출생 및 유년기
국정 충지는 분카 7년(1810년)에 우에노국 사와이군 국정촌(현재 군마현 이세사키시 국정정)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국정촌은 아카기산 남록에 위치한 마을로, 농가는 쌀과 보리 재배 외에 농한기 부업으로 양잠도 병행했다. 나가오카 가문의 보리사인 요주지(養寿寺)의 묘비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국정촌의 농부 요고자우에몬(与五左衛門)이며, 어머니는 고카 2년(1845년) 5월 14일에 사망했다.
분세이 2년(1819년) 5월 20일에 아버지 요고자우에몬이 사망하면서, 충지는 청년기에 무숙(떠돌이 신세)이 되었고, 가독은 동생 토모조(友蔵, ~ 메이지 11년(1878년))가 이어받았다. 동생 토모조는 양잠 외에 실크 상업을 시작하여 무숙이 된 충지를 보호했다. 충지와 토모조는 나가오카 가문의 보리사인 요주지에서 데라코야를 운영하던 주지 사다젠(貞然)에게 배웠던 것으로 추정되며, 요주지에는 토모조가 충지에게 돈을 빌렸다는 증명서도 남아 있다.
1.2. 협객 활동 시작
충지는 조슈 세타군 오마에다촌(현 군마현 마에바시시)의 박도 오마에다 에이고로(大前田英五郎)로부터 세력권을 이어받아 도도촌(百々村)의 보스가 되었다. 그는 닛코 레히시 가도의 간숙(間宿)인 사카이마치를 거점으로 하는 박도로, 오마에다 에이고로와 적대 관계에 있던 시마무라 이사부로(島村伊三郎)와 대립했다. 충지는 이사부로의 세력권을 침범하다가 붙잡혔으나, 이사부로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충지는 이사부로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고, 그의 부하인 미키 분조(三木文蔵)가 이사부로 일당과 다툼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덴포 5년(1834년), 충지는 이사부로를 살해하고 그의 세력권을 빼앗았다. 이후 충지는 잠시 간토 취체역의 관할을 벗어난 신슈로 피신했다가 조슈로 돌아와 자신만의 일가(一家)를 형성했다. 이때 하쿠라 칸도가 저술한 《아카기로쿠》에 따르면, 충지의 의형제와 자식처럼 따르는 부하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마치 중국의 소설 수호전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묘사되기도 했다.
1.3. 주요 활동과 도피
이사부로 살해 이후, 충지는 닛코 레히시 가도의 타마무라슈쿠(玉村宿)를 거점으로 하는 타마무라 쿄조(玉村京蔵)와 슈마(主馬) 형제와 대립했다. 덴포 6년(1835년)에는 타마무라 형제가 산노도촌의 민고로(民五郎)의 도박장을 습격한 것을 발단으로 대립이 격화되었다. 충지는 민고로에게 부하 두 명을 보내 타마무라 형제를 습격하여 물리쳤다.
덴포 9년(1838년)에는 세라다의 도박장이 간토 취체역 포수들에 의해 습격당해 미키 분조가 체포되었고, 충지는 분조 구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간토 취체역의 추격이 심해지자 충지는 도망쳤고, 분조 외에도 부하인 간자키 토모고로(神崎友五郎)와 핫슨 사이스케(八寸才助) 등도 처형되어 일가에 큰 타격을 입었다. 덴포 10년(1839년)에는 막부가 간토 취체역의 부정을 적발하고 인력을 일신하여 체제를 강화했다.
덴포 12년(1841년), 충지가 아이즈로 도피해 있는 동안 타마무라 슈마가 산노 민고로를 살해하여 반격에 나섰다. 이듬해 정월, 충지는 귀환하여 슈마를 살해했다. 《아카기로쿠》에 따르면 이때 충지는 18명의 부하를 이끌고 서양식 단총(洋制短銃)을 휴대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덴포 7년에 의형제 치바 쇼헤이가 살해되었을 때도 20명의 부하와 함께 화승총(火鎗)과 도검(刀矛)을 소지하고 복수하러 나섰다고 전해진다. 이어서 같은 해 8월에는 간토 취체역의 길 안내원(메아카시) 역할을 하던 미무로 칸스케(三室勘助)와 타라키치(太良吉) 부자를 살해했다. 칸스케 살해로 인해 나카야마 세이치로 등 간토 취체역은 경계를 강화하고 충지 일가에 대한 일제 수배를 실시했다.
또한 덴포 13년에는 로주 미즈노 타다쿠니가 도쿠가와 이에요시 쇼군이 67년 만에 닛코 참배를 계획하면서, 같은 해 4월 13일부터 21일까지 이를 실시했다. 이에 따라 박도와 무숙자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다. 충지는 신슈 가도의 오도(大戸, 후의 군마현 아가츠마군 히가시아가츠마정) 관소를 돌파하고 아이즈로 도망쳤으나, 닛코 엔조(日光円蔵)와 아사지로(浅次郎) 등의 부하들을 잃었다.
1.4. 텐포 대기근 구제 논란
국정 충지는 덴포 대기근(1833년 ~ 1839년) 당시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국정촌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군마현 다카사키시 출신의 재야 역사가인 타무라 에이타로(田村栄太郎)에 의해 부정된 바 있다.
다만, 하쿠라 칸도(羽倉簡堂)가 간토 대관으로서 지배하는 마을들을 순시했던 덴포 8년(1837년) 당시의 일기인 '사이사이로쿠(済菑録)'에는 "산중에 적이 있어, 충지라고 불린다. 패거리 수십 명을 결성하여 지난 겨울부터 자주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충지 사후에 기록된 '아카기로쿠(赤城録)'에도 유사한 내용이 발견된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그 실체는 다를지라도 충지가 빈민 구제에 힘썼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다. 이처럼 그의 자선 행위에 대한 역사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정 충지는 대기근 시기 고통받는 민중을 도운 '의적'으로 널리 인식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1.5. 말년과 체포
이후 충지는 고카 3년(1846년)에 조슈로 귀환했으나, 이 무렵부터 중풍을 앓기 시작했다. 가에이 2년(1848년)에는 자신의 후계자 자리를 부하인 사카이가와 야스고로(境川安五郎)에게 넘겨주었다. 충지는 조슈에 머무르며 자신의 세력권 내에서 숨어 지냈으나, 이듬해 가에이 3년 8월 24일(1850년 9월 29일)에 타베이촌 명주의 집에서 간토 취체역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와 함께 그의 주요 부하들도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충지는 에도의 간정봉행 이케다 요리마사(池田頼方)의 관청으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았고, 코덴마초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도박, 살인, 살인교사 등 다양한 죄명이 있었으나, 가장 중죄인 오도 관소(大戸関所) 돌파죄로 인해 당시 간정봉행 겸 도중봉행 이케다 요리마사의 명령에 따라 우에노국 아가츠마군 오도촌 오도 관소(군마현 히가시아가츠마정 오도)로 이송되어 오도 처형장에서 책형에 처해졌다. 향년 41세였다.
1.6. 처형과 사후 처리
국정 충지의 시신은 사흘간 효수된 후 버려졌다. 그의 목을 포함한 시신은 누군가에 의해 도난당했는데, 국정촌 요주지의 주지이자 법인이었던 사다젠(貞然)의 기록에 따르면, 사다젠은 충지의 목을 몰래 절로 가져와 공양했다고 한다. 이후 간토 취체역의 수색이 강화되자 사다젠은 충지의 목을 다시 파내어 다른 곳에 숨겼다고 한다. 사다젠의 기록에 따르면 충지의 계명은 "나가오카인 호요 카라쿠 코지(長岡院法誉花楽居士)"였다.
충지의 13주기였던 분큐 원년(1861년)에 사다젠이 사망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오도촌의 츠치야 주우고로(土屋重五郎)와 본슈쿠촌 또는 오가시와기촌의 가스미 토자에몬(霞藤左衛門)을 후원인으로 하여 오도 형장 터에 충지 지장(忠治地蔵)이 건립되었다. 또한 군마현 이세사키시 쿠루와정에 위치한 젠오지에는 충지의 첩이었던 기쿠치 토쿠(菊池徳)가 세운 "정심분(情深墳)"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충지의 계명을 "유도 카라쿠 코지(遊道花楽居士)"로 기록하고 있다.
메이지 15년(1882년)에는 나가오카 가문의 후계자인 곤타(権太)가 충지 부부의 묘비를 건립했으며, 비명은 옛 이세사키 번의 유학자였던 아라이 자쿠리(新井雀里)가 작성했다.
2. 인물상과 일화
국정 충지는 그 특유의 용모와 다채로운 일화를 통해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1. 용모와 평판
간토 취체역이 시모니타의 명주에게 보낸 인상착의 서류에는 충지의 용모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키는 중간이고, 특히 매우 살이 쪘으며, 얼굴은 둥글고 콧날이 곧으며 피부는 흰 편이다. 머리채는 크게 틀어 올렸고, 눈썹은 진하며, 그 외에는 늘 스모 선수 같은 체격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의 초상화는 아시카가의 화가 타사키 소운(田崎草雲)이 그렸는데, 차를 마시는 곳에서 우연히 한 번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그 인상을 그림으로 남겼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싸움에 매우 강하여 "국정 충지는 도깨비보다 무서워, 씨익 웃으며 사람을 벤다"는 노래가 불릴 정도로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쳤다.
2.2. 주요 일화

- 검술 실력에 자신 있었던 충지는 당시 일본 최고로 소문난 북진일도류 도장으로 도장 깨기를 하러 갔다가, 진검 승부를 겨루려 했다. 그러나 치바 슈사쿠는 충지의 자세에서 승부의 흐름을 간파하고 일찍이 그 자리를 떴다. 격분했던 충지는 문하생들의 설득으로 목숨을 건졌음을 깨닫고 도장을 떠났다.
- 일화가 많은 인물이지만, 토토미국 서쪽으로 여행하던 중 가케가와시의 박도 도야마노 류조(堂山の龍蔵)라는 거만한 보스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여관에 묵었던 적이 있었다. 면목이 상했다고 격노한 류조가 목숨을 빼앗으려 쫓아와 앞에 가로막았지만, 상대가 류조임을 확인한 충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충지의 이세 참배다. 같이 갈 텐가?"라는 대사를 남기고 떠났다. 어이없어 하던 류조는 한참 후까지도 충지의 담력과 사내다움을 "충지라는 녀석은 대단한 녀석이다, 대단한 녀석이라고 들었지만 정말 대단한 녀석이었다"며 칭찬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야마우로슈진(山雨楼主人)이라는 필명을 쓴 무라모토 키요사쿠(村本喜代作)의 '엔슈 협객전'에 기원한다.
- 신슈로 도망치던 충지가 지역 보스의 집에 머물렀을 때, 그 보스의 아내가 "요즘 여행자가 많아 살림이 힘들다"고 푸념했다. 이를 들은 충지는 "나는 열다섯 살부터 얻어먹고 자랐다. 쌀값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게다가 타고나기를 사양할 줄 모른다"며 소금에 절인 연어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 먹고, 큰 검은 사발로 밥을 열 그릇 이상 억지로 채워 아내를 당황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출처: 마스다 토모야의 '시미즈 지로초와 그 주변' 1974년).
- 충지와 시마무라 이사부로, 칸스케의 후손들은 '충지 단베카이'의 중재로 2007년 6월 2일에 '데우치시키'를 통해 170년 만에 화해했다.
3. 문화적 재현
국정 충지는 일본의 연극, 영화, 문학, 음악,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대중문화의 주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3.1. 연극 및 가극
국정 충지는 신국극과 대중 연극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신국극에서는 1919년(다이쇼 8년) 오사카 벤텐자(弁天座)에서 상연된 행유 이풍(行友李風) 극본의 『국정 충지』가 초연되었다. 초연 당시 배역은 국정 충지 역에 사와다 쇼지로(澤田正二郎), 이타와리노 아사타로(板割の浅太郎) 역에 타나카 카이스케(田中介二), 시미즈 간테츠(清水巌鉄) 역에 카나이 긴노스케(金井謹之助), 타카야마 사다하치(高山定八) 역에 오가와 류(小川隆), 닛코 엔조(日光円蔵) 역에 쿠라하시 센타로(倉橋仙太郎), 카와타야 소베에(川田屋惣兵衛) 역에 나카타 쇼조(中田正造)였다.
오늘날 전해지는 대본(『행유 이풍 희곡집』 수록 '고쿠주쿠 쿠니사다 추지')은 5막 7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오이 히로스케(大井広介)에 따르면 『국정 충지』는 통째로 상연되는 경우가 드물었고, 음침한 후반부는 생략되거나, 2막 '아카기 텐진산 후도노모리(赤城天神山不動の森)'부터 3막 3장 '한고노 마츠나미키(半郷の松並木)'까지, 또는 '아카기 텐진산 후도노모리'만 상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 '아카기 텐진산 후도노모리'에서 충지의 대사 "아카기산도 오늘 밤이 마지막, 태어난 고향 국정 마을과, 세력권을 버리고 나라를 버리고, 사랑스러운 부하 너희들과도, 헤어져 갈 길이다"나 "카가국의 주민 코마츠 고로 요시카네가 단련한 명검, 만년 연못의 눈물에 정화되어, 나에게는 평생 너라는 강한 아군이 있었다"는 가부키의 결정적인 대사처럼 널리 퍼져 국정 충지의 이미지를 결정지었다.
대중 연극에서는 2011년 5월에 사이조 아키라(西条晃, 현 소가노야 아키라)가 국정 충지의 처형 장면까지의 장편 연극을 상연했다. 또한 엔카 가수들의 공연에서도 자주 연기되며, 예를 들어 키타지마 사부로의 특별 공연에서도 이 이야기를 극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
3.2. 영화
국정 충지를 소재로 한 영화는 일본 영화사 전반에 걸쳐 꾸준히 제작되었다.
3.2.1. 전전
- 『실설 국정 충지 기러기 무리』(1923년, 쇼치쿠 키네마 카마타 촬영소), 노무라 요시테이 감독, 카츠미 요타로 주연.
- 『추지 여정 일기』(1927년, 닛카츠 타이쇼군 촬영소), 이토 다이스케 감독, 오코치 덴지로 주연.
- 『국정 충지』(1933년, 치에조 프로),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 카타오카 치에조 주연. 시보사와 칸의 신문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아와야 노리코의 노래와 원작자 시보사와가 작사한 나카노 추하레의 노래가 양면 A면 레코드로 발매되었다.
- 『아사타로 아카기의 노래』(1934년, 쇼치쿠 키네마), 아키야마 코사쿠 감독, 타카다 코키치 주연. 쇼치쿠 키네마의 첫 토키(유성 영화) 작품이었다. 영화보다 토카이린 타로의 주제가 『아카기의 자장가』가 크게 히트했다.
- 『국정 충지 신슈 자장가』(1936년, 마키노 토키 제작소), 마키노 마사히로 감독, 츠키가타 류노스케 주연.
- 『추지 혈소기』(1936년, 마키노 토키 제작소), 쿠보 타메요시・마키노 마사히로 공동 감독, 하야마 준노스케 주연.
- 『추지 활살검』(1936년, 마키노 토키 제작소), 쿠보 타메요시・마키노 마사히로 공동 감독, 시미즈 에이타로 주연.
3.2.2. 전후 작품
- 『국정 충지』(1946년, 다이에이) - 마츠다 사다츠구 감독, 반도 츠마사부로 주연.
- 『국정 충지』(1954년, 닛카츠) - 타키자와 에이스케 감독, 타츠미 류타로 주연. (타츠미판 충지는 신국극의 간판 연목이었다)
- 『아카기의 피연기 국정 충지』(1957년, 쇼치쿠) - 시보사와 칸 원작, 후쿠다 하루이치 감독, 타카다 코키치 주연.
- 『국정 충지』(1958년, 토에이) - 행유 이풍 원작, 마츠다 사다츠구 감독, 카타오카 치에조 주연.
- 『국정 충지』(1960년, 토호) - 타니구치 센키치 감독, 신도 카네토 각본, 미후네 토시로 주연.
- 『로쿄쿠 국정 충지 아카기의 자장가 피연기 신슈 길』(1960년, 다이니 토에이), 후유시마 야스조 감독, 와카스기 케이노스케 주연.
3.3. 문학
국정 충지의 삶과 전설은 여러 작가들의 소설로도 재탄생했다.
3.3.1. 장편 소설
- 『국정 충지』- 히라이 밤무라 (고단샤, 1916년)
- 『국정 충지』- 시보사와 칸 (개조사, 1933년)
- 『국정 충지』- 하세가와 신 (에도 서원, 1947년)
- 『신설 국정 충지』- 단 카즈오 (지쿠마쇼보, 1961년)
- 『사설 국정 충지』- 사사자와 사호 (주오코론샤, 1973년)
- 『하얀 꽃이 나체에 흩어지다: 신 아카기록 국정 충지전』- 다케치 테츠지 (도엔쇼보, 1976년)
- 『덴포 국정 충지 무뢰록』- 사사자와 사호 (쇼덴샤, 1989년)
- 『국정 충지』- 츠모토 요 (고분샤, 2006년)
3.3.2. 단편 소설
- 「이레후다(入れ札)」- 키쿠치 칸 (『주오코론』1921년 11월호)
- 「잔협(惨侠)」- 이쿠시마 지로 (『쇼세츠 NON』1990년 5월호)
3.4. 음악 및 드라마
국정 충지의 이야기는 대중음악과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그 인기를 이어갔다.
- 음악
- 야기부시
- 토카이린 타로 - 『아카기의 자장가』(1934년), 『충지 자장가』(1938년), 『명월 아카기산』(1939년), 『잘 있어라 아카기여』(1947년)
- 드라마
- 『자토이치 이야기』 - 제16화 『아카기 돌풍(赤城おろし)』(1975년) 원작: 시보사와 칸, 연기: 타츠미 류타로
- 『텐카 도도』 -(1973년~1974년) 연기: 야마야 하츠오
- 『충지 여정 일기』 -(1992년) 연기: 키타오지 킨야
4. 역사적 평가와 유산
국정 충지는 죄인이자 동시에 의적이라는 상반된 이미지 속에서 역사적으로 평가되어 왔으며, 그의 유산은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의미를 찾고 있다.
4.1. '의적' 이미지와 논란
국정 충지의 '의적' 이미지는 주로 덴포 대기근 시기 그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국정촌 주민들에게 시여(施与)했다는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농민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상황이었기에, 약자를 돕는 협객의 이야기는 대중에게 큰 위안과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선 활동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재야 역사가 타무라 에이타로는 그의 자선 활동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동시에 하쿠라 칸도가 간토 대관이었던 하쿠라 칸도의 일기 '사이사이로쿠'와 사후 기록인 '아카기로쿠'에는 충지가 "가난한 사람들을 자주 구제했다"는 내용이 명확히 언급되어 있다. 이는 그의 행위가 최소한 당대 일부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으로 인식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국정 충지의 의적 이미지는 실제 범죄 행위와는 별개로, 어려운 시기에 민중의 기대를 반영하며 형성된 사회문화적 산물로 볼 수 있다.
4.2. 현대적 의미와 화해
국정 충지에 대한 현대적 평가는 그의 '의적' 이미지와 동시에 그의 후손들이 벌인 의미 있는 화해 의식을 통해 새로운 차원을 얻고 있다.
2007년 6월 2일, '충지 단베카이'의 중재로 국정 충지 자신과 갈등을 빚었던 시마무라 이사부로 및 미무로 칸스케의 후손들이 '데우치시키'라는 전통적인 화해 의식을 거행했다. 이는 약 170년에 걸친 과거의 원한과 대립을 공식적으로 청산하는 자리였다. 이러한 화해는 국정 충지가 단순히 과거의 범죄자나 영웅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역사적 상처와 화합을 상징하는 인물로 재조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이야기는 개인의 비극을 넘어 공동체의 화해와 용서라는 현대적 가치를 반영하며 지속적인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5. 기념물 및 관련 사적지
국정 충지와 관련된 다양한 기념물과 사적지들이 일본 각지에 남아 그의 발자취와 대중적 인기를 증명하고 있다.
5.1. 군마현
군마현에는 국정 충지의 생애와 관련된 중요한 장소들이 다수 남아 있다.

요주지(養寿寺)는 이세사키시에 위치한 사찰로, 국정 충지의 묘(나가오카 충지 묘)가 이곳에 있다. 그의 가족 보리사였던 이곳은 충지의 삶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젠오지(善應寺)는 이세사키시 쿠루와정에 위치하며, 충지의 첩이었던 기쿠치 토쿠가 세운 '정심분(情深墳)'이 있다. 이곳에는 충지의 계명이 기록되어 있다.

쇼넨지(称念寺)는 타마무라정에 위치한 사찰로, '이가모즈카'(家鴨塚)가 있어 충지 관련 사적지로 알려져 있다.

히가시아가츠마정에는 충지와 관련된 특별한 기념물들이 있다. '충지와 방황의 소나무'(忠治とまどいの松)는 충지가 도피 중에 잠시 머물렀던 장소로 전해지는 소나무이다.

또한 히가시아가츠마정에는 '충지 지장(忠治地蔵)'이 세워져 있어, 충지의 영혼을 기리고 있다.

히가시아가츠마정의 오도(大戸)에 위치한 오도 관소(大戸関所)는 충지가 도피 중 돌파했던 중요한 역사적 장소로, 그의 대담한 행동을 상징한다.

마에바시시에 있는 아카기 온천향에는 충지의 이름을 딴 '충지 온천(忠治温泉)'이 있어, 지역 문화와 연계된 관광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5.2. 나가노현
나가노현에도 국정 충지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스자카시 카미마치(上町)의 주센인(寿泉院)에는 충지와 관련된 「지장당(地蔵堂)」이 있다.
나가노시 곤도마치의 아키바 신사 경내에는 「국정 충지의 묘비」가 건립되어 있다.

시가 고원 스즈리카와 호텔 앞 마에야마 리프트 탑승장 부근에는 「충지의 숨은 바위」가 전해진다.
노자와 온천촌에는 재건된 「충지 지장」이 충지를 기억하게 한다.
나카노시 마츠자키(松崎)의 하치카고 용수로 취수구 부근에는 국정 충지가 건넜다고 전해지는 돌다리가 남아 있다.
「쿠사츠 길(충지)의 돌다리(草津道(忠治)の石橋)」는 보존회에 의해 안내석비 설치와 쿠사츠 길 복원이 이루어져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있다.